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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소한 일상

[약초 공장] 산에서 만난 사람들

by 사람들생각 2025. 3. 16.

▣  옮겨온 글 ▣

예전 블로그에 써두었던 글을 옮겨 왔다. 문장은 그때 그대로 두고, 읽기 편하게 조금만 매만졌다.


 

시골에 내려오면 사람이 그리워질 거라고들 한다.

나는 반대였다.

혼자가 편해서 내려온 사람이었고, 당분간은 아무하고도 엮이고 싶지 않았다.

그 생각이 완전히 바뀐 게 그해 봄, 그 공장에서였다.

 



■ 면접 보러 가던 날

근처 약초 가공 공장에서 사람을 구한다는 얘기를 들었다.

약초를 대량으로 채취해 도매로 약재상에 넘기는 곳이라고 했다.

2월 말, 면접을 보러 갔다.

큰길에서 보니 약초 공장이 바로 보였다.

시골 한가운데 있는 공장이니 나이 지긋한 분들이 일하시겠거니 했는데, 막상 안으로 들어가 보니 분위기가 뜻밖이었다.

작업장에서 일하는 사람들이 대부분 나와 두어살 차이나는 또래인것 같았다.

그 자리에서 마음이 정해졌다.

나중에 들어보니 서울 경기쪽에서 살다가 시골이 좋아서 내려 왔다고 했다.

서로 왜 내려왔는지는 묻지 않았다.

서울에서 사람을 만나면 명함을 주고받고 어느 회사 어느 자리인지를 먼저 확인하는 게 순서였다.

그 공장에서는 그걸 묻는 사람이 없었다.

작업장 안쪽에서 누가 고개를 들어 인사하면 나도 고개를 숙였고, 그게 전부였다.

그 짧은 인사가 이상하게 편했다.

사장님은 일이 고될 거라는 말부터 하셨다.

산에 올라가야 하고, 무거운 걸 옮겨야 하고, 지게질도 해야 할거라고.

 

월급은 많지 않았다.

그 전과는 비교할 수준이 아니었는데, 그 자리에서 그 생각은 들지 않았다.

비교할 대상이 없어지면 숫자가 그냥 숫자로만 보인다.

일이 뭔지 제대로 듣기도 전에 언제부터 나오면 되냐고 먼저 물었다.

돌아오는 길에 창문을 내리고 달렸다.

한 달 넘게 쓰기만 하던 통장에 다시 뭔가가 들어온다는 것보다, 아침에 갈 데가 생겼다는 쪽이 더 좋았다.

집에 도착해 마당에 들어서자 팔복이가 평소보다 더 반기는 것 같았는데, 아마 내 표정 때문이었을 거다.

 

약초 공장 앞 마당



■ 아침 일곱 시의 공장

출근은 이른 아침이었다.

집에서 공장까지 차로 십여 분, 창문을 열고 달리면 아직 찬 공기가 그대로 들어왔다.

마당에 차를 대면 팔복이가 대문 앞까지 따라 나와 섰다가, 내가 가라고 손짓하면 그제야 마당 안으로 들어갔다.

공장에 도착하면 먼저 온 사람들이 작업장 앞에 쪼그려 앉아 믹스커피를 타 마시고 있었다.

종이컵을 하나 받아 들고 같이 앉아 있다 보면, 그날 어느 산으로 올라가는지 어느 밭으로 가는지가 정해졌다.

공장이라고 해도 큰 건물이 있는 게 아니었다.

작업장 하나와 건조장, 세척하는 자리와 자르는 기계가 전부였고 나머지는 전부 마당이었다.

마당 한쪽에는 산에서 내려온 것들이 종류별로 쌓여 있었고, 그 옆으로 트럭 두어 대가 서 있었다.

비 오는 날이면 산에 못 올라가는 대신 그 마당에서 하루 종일 선별하고 다듬는 일을 했다.

작업 지시라기보다는 아침마다 반복되는 짧은 의논에 가까웠다.

처음 며칠은 내가 뭘 해야 할지 몰라 눈치만 봤다.

누가 시키기 전에 짐을 들려고 하면 그건 그렇게 드는 게 아니라며 손을 잡아 돌려줬다.

가르쳐주는 말투에 생색이 없었다.

자기들도 처음에 그렇게 배웠다는 얼굴이었다.

일주일쯤 지나니 내 자리라는 게 생겼다.

누가 정해준 건 아니고, 작업장 들어가서 앉는 자리가 자연스럽게 정해졌다는 뜻이다.

장갑도 내 걸 따로 두게 됐고, 주걱도 손에 맞는 걸 하나 골라서 썼다.

그런 사소한 것들이 생기면서 그곳이 내가 다니는 데가 됐다.


 

■ 어머님들과 막내

일하는 사람들 구성이 생각과 달랐다.

실제로 산에 같이 올라가는 분들은 동네 어머님들이 많았다.

연세가 적지 않은데도 손이 빠르고 지치는 기색이 없었다.

나는 한 고랑, 아니 나무 한 그루를 붙들고 씨름하는 동안 그분들은 벌써 저만치 앞에 가 계셨다.

처음엔 내가 남자고 힘도 있으니 금방 따라붙겠다고 생각했다.

그 생각이 얼마나 안 맞는 소리였는지는 이틀이 지나면서 알게 됐다.

먼저 내려와 일을 시작한 귀농 귀촌 선배들도 마찬가지였다.

나름 몸 쓰는 걸 겁내지 않는 편인데도 힘에 부쳐서 따라가질 못했다.

막내라고 부르던 친구가 하나 있었다.

나이는 제일 어린데 일은 제일 잘했고 성격도 좋아서 다들 좋아했다.

그 친구는 여름까지 일하고 그만뒀다.

일본에 공부하러 간다고 했는데, 그 뒤로 소식은 못 들었다.

어디서든 잘할 친구라 걱정은 안 했다.

팀장이라고 부르는 사람도 있었다.

회색 티를 즐겨 입었고, 하는 말에 뻥이 좀 섞여 있었다.

오늘 하루면 끝난다는 말을 자주 했는데 그 말이 맞은 날이 거의 없었다.

그래도 그 사람이 그렇게 말해주면 다들 한 번 웃고 다시 손을 움직였으니, 그게 그 사람 역할이었던 것 같다.




■ 사연을 묻지 않는 사이

일하다 쉬는 시간이면 작업장 뒤편 그늘에 앉아 이런저런 얘기를 했다.

예전에 뭘 했는지, 왜 내려왔는지를 먼저 묻는 사람은 없었다.

대신 어디 사는지, 밥은 해 먹는지, 집이 춥지 않냐고 물었다.

집에 개 한 마리 있다고 하니 다들 한 번씩 보고 싶다고 했다.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밥을 편하게 먹는 사이가 되었고, 누가 결근하면 다음 날 괜찮냐고 묻는 정도의 사이가 됐다.

딱 그 정도의 거리가 좋았다.

서로 과거를 모르니까 지금 하는 일로만 사람을 봤다.

짐을 같이 들어주는지, 자기 몫을 끝까지 하는지, 다친 사람 옆에 서 있는지.

그걸로 사람이 다 설명되는 데가 있다는 걸 그때 처음 알았다.

예전에는 사람을 알려면 그 사람 이력부터 들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반나절 같이 산을 오르면 이력보다 훨씬 많은 게 보였다.

깊이 캐묻지 않으면서도 서로 어떤 상태인지는 아는, 그런 거리였다.

돌아보면 그게 그 시절 나한테 제일 필요했던 간격이었던 것 같다.




■ 팔복이 때문에 생긴 말

사람 사는 데가 다 그렇겠지만 시골 인심이 야박해졌다는 말을 그 무렵에 몸으로 겪었다.

내려오기 전에 그런 얘기를 들은 적은 있었다.

남의 일이라고 생각했는데 막상 내 일이 되니 그렇지가 않았다.

제일 많이 걸린 건 팔복이였다.

마당이 넓어서 풀어놓고 키웠는데 그걸 두고 주변에서 말이 나왔다.

덩치가 산만 한 진도견이 마당에 돌아다니는 게 무서워서 싫다는 쪽이었다.

목줄 없이도 내 옆에 붙어 걷는 녀석이라 사람한테 달려드는 일이 없었는데, 그런 설명이 통하지 않았다.

저녁에 데리고 산책을 나갈때도 집이 없는 쪽으로 다녔다.

 

앞에서는 웃으면서 뒤에서 말이 도는 경우도 있었다.

듣지 말았어야 할 얘기를 전해 들은 적도 있다.

외지에서 들어온 사람한테 그 정도 시선은 어디든 있는 거라고 생각하고 넘겼는데, 솔직히 매번 그렇게 넘어가지지는 않았다.

그래도 그 동네에서 나를 그냥 사람으로 봐주는 분들을 하나씩 알게 됐다.

이장님과 청년회장님을 알게 된 것도 그때쯤이었는데, 두 분 다 알고 보니 외지에서 들어온 분들이었다.

서먹하게 인사만 주고받다가 몇 번 마주치면서 자연스럽게 가까워졌고, 나중에는 같이 밥도 먹고 술도 마시는 사이가 됐다.

먼저 들어와 본 사람들이라 말하지 않아도 아는 게 있었던 것 같다.

 



 

■ 막걸리 한 잔

일이 끝나면 자연스럽게 술자리가 이어졌다.

작업장 한쪽에 평상을 펴고 둘러앉아 막걸리를 돌렸고, 안주는 공장에서 삶아낸 것이나 누가 집에서 가져온 김치가 전부였다.

날이 따뜻해지면서부터는 아예 마당에 불을 피우고 둘러앉는 날도 생겼다.

누가 집에서 고기를 조금 가져오면 그날은 잔치였고, 아무것도 없으면 라면을 끓여 나눠 먹었다.

하루 종일 산을 오르내린 뒤에 마시는 그 한 잔은, 솔직히 술맛이라기보다 몸이 풀리는 맛이었다.

한 잔 돌고 나면 아무 말 없이 각자 컵만 기울이다가, 누군가 한마디 던지면 다 같이 웃었다.

웃긴 얘기도 아니었는데 그렇게 웃었다.

몸이 고단한 사람들끼리 앉아 있으면 말이 길어지지 않는다.

말을 많이 해야 하는 자리에 오래 앉아 있다 온 사람한테는, 말을 안 해도 되는 자리가 쉬는 자리였다.

술자리에서 각자 사연이 조금씩 새어 나오기도 했다.

누구는 하던 가게를 접고 내려왔다고 했고, 누구는 몸이 상해서 쉬러 왔다가 눌러앉았다고 했다.

그런 말이 나와도 누구 하나 꼬치꼬치 묻지 않았고, 그냥 잔을 한 번 더 채워줄 뿐이었다.

나도 내 얘기를 길게 하지 않았다.

다만 개 한 마리 데리고 내려왔다는 말은 몇 번 했고, 그 말에 다들 고개를 끄덕였다.

집에 돌아오면 팔복이가 마당에서 뛰어나왔고, 술 냄새가 나는 나를 한 바퀴 돌며 확인하고는 마루 끝에 엎드렸다.

그 시절 내 하루는 아침에 믹스커피로 시작해서 밤에 그 녀석 숨소리로 끝났다.

 

자연산 송이와 한우구이 그리고 막걸리




■ 사람은 부대끼며

내려올 때 나는 사람한테 많이 지쳐 있었다.

잘될 때 옆에 있던 사람들이 어떻게 멀어지는지를 겪고 난 뒤라, 당분간은 누구와도 가까워지고 싶지 않았다.

그런데 사람한테 받은 상처는 결국 사람으로 메워진다는 말이 괜히 있는 게 아니었다.

같이 땀 흘리고, 같이 밥 먹고, 같이 산비탈을 미끄러지는 사이가 되면서 나는 조금씩 제자리로 돌아왔다.

아침에 일어나는 게 싫지 않았고, 밥이 맛있어졌고, 밤에 잠이 잘 왔다.

거창한 변화가 아니라 그런 기본적인 것들이 하나씩 제자리를 찾았다.

사람이 무너지는 건 큰일 하나 때문이 아니고, 아침에 일어날 이유가 없어질 때라는 걸 그 무렵에 알았다.

반대로 다시 서는 것도 마찬가지였다.

대단한 계기가 아니라 아침 일곱 시에 갈 데가 하나 있는 것부터였다.

그 공장에 다닌 넉 달 동안 나는 돈을 모으지 못했다.

대신 아침에 눈을 뜨는 습관을 되찾았다.

그게 그해 봄 내가 얻은 거였다.

그때 서로 사연을 묻지 않았던 사람들이, 한참 지나고 나서야 하나씩 자기 얘기를 꺼내더라.

먼저 묻지 않았기 때문에 나중에 들을 수 있었던 거라고 생각한다.

사람 사이에 급한 건 없다는 걸, 나는 그 공장에서 배웠다.

그해 봄의 나는 그걸 몰랐고, 그냥 아침마다 거기로 차를 몰고 갔을 뿐이다.

 




"德不孤 必有隣" (덕불고 필유린)

중국 춘추시대의 사상가 공자는 수십 년 동안 여러 나라를 떠돌며 자신의 뜻을 받아줄 임금을 찾았지만, 가는 곳마다 거절당하고 때로는 쫓기듯 국경을 넘어야 했다.

밥을 굶는 날도 있었고 제자들마저 지쳐 불평할 만큼 처지가 어려웠지만, 공자는 끝까지 자기가 옳다고 믿는 바를 바꾸지 않았다.

그런 그의 곁에는 신분도 성격도 제각각인 제자들이 끝내 남아 함께 길을 걸었고, 그 가르침은 후대까지 이어졌다.

제자들이 엮은 『논어』 이인편에 "덕이 있는 사람은 외롭지 않다, 반드시 이웃이 있다"는 이 구절이 실려 있다.

 

— 공자(孔子, 기원전 551~479). 중국 춘추시대의 사상가·교육자. 『논어(論語)』 이인(里仁)편.

 

사람이 모이는 자리는 따로 정해져 있지 않고, 자기 자리에서 묵묵히 제 몫을 하는 사람 주변에 저절로 생긴다는 뜻이다.

억지로 사람을 끌어모으려 애쓰는 대신 지금 있는 자리를 성실하게 지키는 편이, 결국 더 멀리 가는 길이 되기도 한다.

그렇게 쌓인 인연은 당장 무엇이 되지는 않아도, 때가 왔을 때 가장 먼저 손을 내밀어 주는 쪽이 된다.

 

산에서 지게를 지며 알게 된 그 친구들도, 그때는 그저 같이 일하는 사이였을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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