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옮겨온 글 ▣
예전 블로그에 써두었던 글을 옮겨 왔다. 문장은 그때 그대로 두고, 읽기 편하게 조금만 매만졌다.
약초라는 걸 나는 그 나이가 되도록 제대로 본 적이 없었다.
한약방에서 지어주는 봉지 안에 뭐가 들었는지 생각해본 적도 없었다.
그게 산에서 어떻게 나와서 어떤 손을 거쳐 그 봉지에 들어가는지, 나는 그해 봄에 처음 봤다.

■ 사월 하순에 시작된 일
두충나무 껍질을 벗기는 작업은 사월 하순에 시작됐다.
내가 처음 올라간 날이 사월 이십사일이었다.
그때쯤 되어야 나무 속에 물이 올라서 껍질이 잘 벗겨진다고 했다.
육월 중순까지는 물이 있어서 벗겨지지만 그 시기를 넘기면 벗길 수가 없다고, 그래서 그 두 달 가까운 기간에 빡세게 해치워야 한다고 했다.
그 말을 듣고 나는 그게 무슨 뜻인지 잘 몰랐다.
며칠 지나고 나서 알았다.
계절이 정해놓은 기간 안에 끝내야 하는 일이라는 건, 사람이 일정을 조절할 수 없다는 뜻이었다.
날이 좋으면 올라가고, 날이 안 좋아도 올라가야 했다.
그게 그 봄의 전부였다.
두충은 나무껍질을 약재로 쓴다.
마가목 열매와 우슬, 두충나무 껍질을 같이 달이면 뼈와 관절, 신경통에 좋다고 했다.
재료값이 많이 들어가는 약재 중 하나라고도 했다.
내가 산에서 벗겨 내려온 그 껍질이 어디선가 그런 용도로 쓰인다는 걸, 나는 한참 뒤에야 제대로 알게 됐다.
그때는 그냥 하루치 일거리였다.
산에 올라가면 눈에 들어오는 게 전부 나무와 풀이었다.
나중에 보니 그중에 약으로 쓰는 게 한둘이 아니었다.
오가피라는 나무도 그때 알았다.
열매부터 나무, 뿌리까지 다 한약재로 쓴다고 했다.
시골은 쉽게 지나치는 하나하나가 다 몸에 도움 되는 약초라는데, 그건 약초를 아는 사람한테나 그렇다.
나처럼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한테는 그냥 풀이고 그냥 나무일 뿐이었다.
이 나이에 시골에서 살려면 공부도 열심히 해야 한다는 걸 그 산에서 깨달았다.
어릴 때부터 노는 건 좋았지 공부는 질색이었는데, 그 나이에 다시 외울 게 생긴 거였다.

■ 주걱으로 비집어 벗기던 껍질
껍질을 벗기는 방법은 생각보다 단순했다.
베어놓은 나무에 가로로 칼집을 낸 다음, 그 틈에 주걱을 비집어 넣고 밀어 올린다.
그러면 껍질이 통째로 홀랑 벗겨져 나온다.
처음 그 장면을 봤을 때 신기해서 한참 들여다봤다.
나무 한 그루가 옷을 벗는 것처럼 하얀 속살이 드러나는데, 그게 좀 민망할 정도로 깨끗했다.
껍질은 길게 통으로 벗겨야 값을 제대로 받는다고 했다.
칼집을 잘못 넣으면 중간에 끊어지고, 너무 깊이 넣으면 속살까지 파였다.
처음 며칠은 성한 껍질보다 끊어진 게 더 많았다.
옆에서 보던 어머님이 말없이 내 주걱을 받아 한 번 밀어 보이시고는 다시 건네주셨다.
그 한 번으로 각도를 알았다.
벗겨낸 껍질을 두 손으로 잡고 천천히 당기면 안쪽에서 하얀 실 같은 것이 거미줄처럼 죽 늘어난다.
그 실이 많이 나와야 좋은 거라고 옆에서 알려줬다.
껍질 안쪽이 미끈하면서도 질긴데, 그 사이를 가느다란 실들이 수십 가닥 이어주고 있었다.
나무 하나에서 그런 게 나온다는 게 쉽게 믿기지 않아서 몇 번이나 다시 당겨봤다.
그다음부터는 껍질을 벗길 때마다 나도 모르게 한 번씩 당겨보게 됐다.
문제는 그 작업을 하루 종일 한다는 것이었다.
주걱을 밀어 넣는 건 손목 힘이 아니라 두 손으로 체중을 실어 비집는 동작이다.
그걸 수백 번 반복하면 저녁에 손가락이 잘 펴지지 않는다.
자고 일어나면 아침에 손가락이 구부러지지 않아서 뜨거운 물에 한참 담갔다가 나갔다.
같이 일하시는 어머님들은 오죽하셨을까 싶었는데, 그분들은 나보다 손이 빨랐고 불평도 없었다.
참 대단들 하시다는 생각을 그 봄에 몇 번이나 했다.
한 가지 분명히 해둘 게 있다.
나는 톱질은 해본 적이 없다.
나무를 베고 자르는 건 할 줄 아는 사람들이 했고, 나는 껍질 벗기고 가지 치는 일을 했다.
멀리서 보면 톱질이 참 쉬워 보이는데, 그건 보는 사람 생각이지 하는 사람 생각은 아닐 거다.

■ 지게를 지고 오르던 길
두충은 가지와 잎, 껍질을 다 쓰는데 채취 기간이 정해져 있어서 우선 껍질만 벗겨 내려오고 가지는 나중에 수거하는 식이었다.
그 껍질을 산 아래까지 옮기는 게 지게였다.
지게라는 걸 나는 어릴적 할아버니 댁에서 본 게 전부였다.
저런 걸 아직도 쓰나 싶었는데, 산에서는 그게 가장 확실한 운반 수단이었다.
트럭이 들어갈 수 있는 데까지는 트럭으로 가지만, 거기서부터는 결국 사람이 걸어 올라가야 했다.
오백 미터에서 육백 미터쯤 걸어 올라가는 현장이 있었다.
상주 도림사가 있는 쪽인데 산 전체가 두충나무였다.
그 많은 껍질을 일일이 지게로 져서 내려왔으니, 지금 생각하면 그게 어떻게 됐나 싶다.
그 산에서만 열흘 가까이 작업했다.
하루 일과는 단순했다.
아침에 모여 그날 올라갈 산을 정하고, 트럭으로 갈 수 있는 데까지 가서 거기부터 걸어 올라간다.
올라가서 자리를 잡으면 베는 사람이 먼저 들어가고, 우리는 그 뒤를 따라가며 껍질을 벗기고 가지를 쳤다.
점심은 싸 간 걸 그 자리에서 먹거나 내려와서 먹었다.
오후에 벗긴 것을 모아 지게로 몇 차례 내리고, 트럭에 실어 공장으로 돌아온다.
공장에 와서 끝이 아니라 그걸 건조장에 널어야 그날 일이 끝났다.
널 때도 겹치지 않게 펴야 하고 중간에 한 번씩 뒤집어줘야 고르게 마른다.
비 소식이 있는 날은 아침부터 모두가 하늘을 몇 번씩 쳐다봤다.
농사짓는 분들이 왜 그렇게 날씨 얘기를 많이 하시는지 그때 알았다.
비가 한 번 길게 오면 널어둔 걸 전부 걷어 들여야 했고, 다 걷어놓고 나면 또 개는 날도 있었다.
그러면 아무 말 없이 다시 널었다.
누구를 원망할 데가 없는 일이라 다들 그냥 몸을 움직였다.
사무실에서 일할 때는 일이 안 되면 원인을 사람 쪽에서 찾았는데, 산에서 하는 일은 그렇지 않았다.
날이 흐리면 흐린 거고, 그러면 그만큼 더 걸리는 것뿐이었다.
그게 답답할 줄 알았는데 오히려 마음이 가라앉았다.
처음 지게를 졌을 때는 짐을 올리기도 전에 무게 중심을 못 잡아 뒤로 자빠질 뻔했다.
빈 지게도 혼자서는 제대로 서 있지 못했다.
요령이라는 게 분명히 있는데, 그건 설명으로는 절반도 전달이 안 되는 종류의 것이었다.
먼저 온 사람이 자기 지게를 지고 몇 걸음 걸어 보이면서, 허리로 지는 게 아니라 다리로 지는 거라고 했다.
그 말의 뜻을 몸으로 알게 되기까지 보름쯤 걸렸다.
무릎을 펴는 순간 짐이 뒤로 넘어가려 하니까 몸이 먼저 겁을 먹고, 겁을 먹으면 허리로 버티게 된다.
허리로 버티면 열 걸음을 못 간다.
짐을 지고 비탈을 내려올 때가 제일 어려웠다.
올라갈 때는 힘만 들면 되는데, 내려올 때는 무게가 앞으로 밀기 때문에 발을 어디에 디딜지를 계속 봐야 했다.
낙엽이 깔려 있으면 그 아래가 돌인지 흙인지 알 수가 없어서, 먼저 가는 사람이 밟은 자리를 그대로 밟고 내려오는 게 제일 안전했다.
줄지어 내려오는 모습이 멀리서 보면 꽤 우스웠을 거다.
그사이 어깨에는 멍이 들었고 허리는 저녁마다 뻐근했다.
집에 돌아와 마루에 누우면 팔복이가 옆에 와서 엎드렸고, 나는 천장을 보면서 오늘 몇 번이나 산을 오르내렸는지 세어보다 잠들었다.
■ 긴팔과 모기
오월로 넘어가면서 날이 더워졌다.
그런데 옷은 오히려 두꺼워졌다.
나무가 우거진 그늘이라 모기와 해충이 많아서 긴팔 긴바지를 반드시 입어야 했다.
더운 날 긴팔을 입고 산을 오르는 게 어떤 건지는 해본 사람만 안다.
그래도 그 정도는 애교로 봐줄 만했다.
진짜 고역은 그늘이 없어진 다음이었다.
두충나무가 우거진 곳을 다 베어버리면 그늘이 통째로 사라진다.
한여름도 아니었는데 햇볕이 그대로 내리쬐니까 오전 중에 등이 다 젖었다.
울창했던 숲이 한 달 만에 민둥산처럼 되는 걸 보고 있으면 기분이 묘했다.
아마 그 산의 생태계가 그때 좀 바뀌었을 거다.
우리 할아버지는 나무를 무척 좋아하셔서 손주들 이름까지 나무에 관련되게 지으셨고, 할아버지 댁 주변에는 과실수가 가득했다.
그 기억이 아직 선명한데, 나는 생나무를 베어 껍질 벗기고 가지 쳐대는 일을 하고 있었다.
할아버지가 살아 계셨으면 뭐라고 하셨을까 하는 생각이 그 산에서 몇 번 들었다.

■ 남은 나무를 싣고 오던 길
껍질을 다 벗기고 나면 알맹이 나무가 남는다.
약재로는 쓰지 않으니 쌓여 있다가 버려지는 것들이었다.
그 나무가 무지 아까웠다.
집에 화목난로를 들여놓은 걸 아는 사장님이 필요하면 가져가라고 하셨고, 그래서 퇴근길이면 차 뒤에 그 나무를 실어 날랐다.
싣기 좋은 곳에 미리 모아두고 주말마다 조금씩 집 마당에 부려놓는 식이었다.
그렇게 서너 차는 실어 나른 것 같다.
그때는 그걸로 겨울이 충분할 거라고 생각했다.
나중에 구월 말부터 난로를 때게 되고 나서야, 한겨울에 또 나무하러 가야 하는 게 아닌가 걱정이 됐다.
집에 도착해 마당에 나무를 부려놓으면 팔복이가 꼭 와서 냄새를 맡았다.
처마 밑에 가지런히 쌓아놓고 보면 올겨울은 춥지 않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산에서 벗긴 껍질은 약재가 되어 어디론가 팔려 나갔고, 남은 나무는 우리 집 난로로 들어왔다.
껍질은 값이 매겨져 트럭에 실려 떠났고, 남은 나무는 값이 없어서 나한테 왔다.
값이 없다고 쓸모가 없는 건 아니라는 걸, 그 겨울 난로 앞에서 몇 번이고 생각했다.

■ 서툰 손이 익숙해지기까지
두 달쯤 지나니 지게가 몸에 붙었다.
짐을 올리는 자세, 일어설 때 다리에 힘을 주는 순서, 비탈에서 발을 디디는 각도가 생각하지 않아도 나왔다.
주걱을 비집는 손도 요령이 생겨서 처음보다 힘이 덜 들었다.
손바닥은 처음엔 물집이 잡혔다가 터지고, 그 자리가 굳으면서 조금씩 두꺼워졌다.
석 달쯤 지나니 예전 손이 아니었다.
도시에서 종일 서류 넘기던 손이 그렇게 되는 데 그리 오래 걸리지 않더라.
누가 가르쳐준 대로 되기까지, 나는 그냥 매일 같은 일을 반복했을 뿐이었다.
처음 며칠은 요령을 빨리 알려달라고 자꾸 물었다.
먼저 온 사람들은 그때마다 웃으면서 해보면 안다고만 했다.
그 말이 성의 없어 보였는데, 지나고 나니 그 말이 정확했다.
설명으로 건너갈 수 있는 거리가 아니었다.
나중에 내가 사업을 하면서 사람을 가르칠 일이 생겼을 때도 비슷했다.
말로 다 알려줘도 결국 몇 번 틀려본 사람만 손이 제대로 나갔다.
그걸 알고 나서는 가르칠 때 말을 줄였고, 틀릴 만한 자리를 미리 비켜두고 한번 해보라고 하고 옆에 서 있었다.
그 방식을 나는 산에서 배웠다.
"Genius is one percent inspiration and ninety-nine percent perspiration."
(천재는 1퍼센트의 영감과 99퍼센트의 노력으로 이루어진다.)
1879년, 미국의 발명가 토머스 에디슨은 오래가는 백열전구를 만들기 위해 전구 안에 넣을 필라멘트 재료를 찾고 있었다.
그는 금속과 식물 섬유를 가리지 않고 수천 가지 재료를 하나씩 태워보며 어느 것이 가장 오래 버티는지를 기록했고, 수없이 실패한 끝에 탄화시킨 대나무 섬유로 긴 시간 꺼지지 않는 전구를 만들어냈다.
훗날 기자가 그 많은 실패를 어떻게 견뎠느냐고 묻자, 그는 실패한 것이 아니라 안 되는 방법을 그만큼 찾아낸 것이라고 답했다.
위의 말은 그가 재능보다 반복된 수고가 결과를 만든다는 뜻으로 남긴 것이다.
— 토머스 에디슨(Thomas Edison, 1847~1931). 미국의 발명가·사업가. 백열전구와 축음기를 비롯해 천여 건의 특허를 남겼다.
좋은 생각이 떠오르는 건 한순간이지만, 그걸 쓸 만한 물건으로 만드는 건 결국 지루한 반복이라는 뜻이다.
머리로 아는 것과 몸이 아는 것 사이의 거리는 설명으로 좁혀지지 않고, 같은 일을 몇 번이나 되풀이한 사람만 그 거리를 건넌다.
어느 분야든 때가 왔을 때 바로 손이 나가는 사람은, 그 전에 조용히 같은 동작을 수없이 되풀이해둔 사람이다.
지게 지는 법도, 주걱을 비집는 법도 누가 한 번 알려준다고 되는 게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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