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옮겨온 글 ▣
예전 블로그에 써두었던 글을 옮겨 왔다. 문장은 그때 그대로 두고, 읽기 편하게 조금만 매만졌다.
처음 마음먹고 내려 왔던 그때와 다르게 시골집에 앉아 판매 전략을 궁리하고 있었다.
사람 마음이라는 게 참 제 뜻대로 되지 않는다.
산에서 해온 걸 도매로 넘기는 자리에 몇 달 서 있다 보면 누구라도 그런 생각이 든다.
우리가 흘린 땀은 아랑곳없이 값부터 후려치는 걸 보고 있으면, 저걸 내가 직접 팔면 어떨까 하는 생각이 안 들 수가 없다.
품질에는 자신이 있었다.
내가 직접 산에 올라가 채취한 것이니 그 점만큼은 누구한테도 뒤지지 않았다.
문제는 자신이 있다는 것과 그걸 팔 줄 안다는 건 전혀 다른 얘기라는 거였다.

■ 내가 먼저 꺼낸 말
그 무렵 조 대표님과 나눈 대화가 흐름을 완전히 바꿔놓았다.
내가 먼저 말을 꺼냈다.
우리 제품은 분명 좋은데 제값을 못 받고 있다고.
서울에서 국내 오픈마켓이랑 미국 이베이에서 물건을 팔아본 경험은 있지만, 약초라는 아이템은 그것과 결이 다르다고.
그래서 걱정이 많다고 솔직하게 털어놓았다.
그분은 잠시 듣고 나서 담담하게 말씀하셨다.
사업은 다 똑같다고.
아이템이 다를 뿐이지 파는 방식은 결국 같지 않느냐고.
시골에서 생산되는 제품이라 해도 도시적인 감각을 더하고, 깔끔한 이미지와 청결한 콘셉트로 다가간다면 분명히 통할 수 있을 거라고.
그 말이 머릿속에 깊이 박혔다.
뭐든 남다르게 하면 달라질 수 있겠지.
그 뒤로 정말 많은 이야기를 나눴다.
성공은 준비된 자의 것이라는 것, 선택과 집중의 중요성, 사업을 운영하면서 놓치지 말아야 할 것들.
한 마디 한 마디가 귀에 따갑도록 들었던 말인데, 그때마다 속으로 고개를 끄덕이고 있는 내가 있었다.
어느 순간 돌아보니 머릿속에서는 이미 사업자를 내고 물건을 팔고 있었다.
식어 있던 열정이 다시 타오르고 있었다.
그 대화를 하고 돌아오던 길이 기억난다.
창문을 내리고 달리는데 머릿속이 바빴다.
몇 달 동안 혼자 굴리기만 하던 생각이 남의 입을 통해 나오고 나니 모양이 생긴 거였다.
혼자 생각할 때는 공상이었는데, 누가 받아주니까 할 일 목록처럼 보이기 시작했다.
그날 밤에 늦게까지 잠이 안 왔다.

■ 조력자가 생겼다
조 대표님이 조력자 역할로 팔을 걷고 나서셨다.
모든 준비 과정을 나와 함께하기로 했고, 서류 작성부터 사업 계획의 뼈대까지 전반적인 것들을 체계적으로 잡아주셨다.
그게 내가 다시 사업자를 낼 수 있었던 가장 큰 계기였다.
솔직히 인정하자면, 그전까지의 나는 머릿속에 대충 계획만 세워놓고 사업을 해왔다.
두서없이 닥치는 대로 하다 보니 부실이 따를 수밖에 없었다.
서울에서의 실패도 돌이켜보면 거기서 비롯된 것이었을지 모른다.
하지만 이번에는 달랐다.
그분의 체계적인 진행 방식 위에서 처음으로 제대로 된 밑그림을 그리고 시작할 수 있었다.
같은 사업이라도 밑바닥부터 다르게 시작하면 올라가는 속도가 다르다는 것을 그때 처음 느꼈다.
무엇을 언제 해야 하는지가 종이 위에 순서대로 적혀 있다는 게 그렇게 든든한 건 줄 몰랐다.
예전에는 머릿속에만 있었다.
머릿속에 있는 계획은 그날 기분에 따라 바뀐다.
종이에 적힌 계획은 안 바뀐다.
그 차이가 결과를 갈랐다.
그분은 내가 뭘 모르는지를 먼저 짚으셨다.
모르는 걸 모른다고 말하면 그때부터 하나씩 채워 넣는 식이었다.
서울에서 사업할 때는 모르는 걸 들키지 않으려고 애쓰다 일을 키운 적이 많았다.
이번에는 그럴 필요가 없었다.
구체적으로는 이런 식이었다.
무엇을 팔 것인지 정하고, 그걸 어떤 형태로 등록할지 정하고, 돈이 들어갈 자리와 나올 자리를 적어보고, 부족한 걸 어디서 메울지 알아본다.
듣고 있으면 당연한 얘기였다.
그런데 막상 그 순서대로 종이에 적어본 사람은 주변에 거의 없었다.
나도 그중 하나였다.
그분은 늘 성공으로 가는 단계를 여덟 가지로 나눠서 설명하셨다.
귀가 따갑도록 들었는데, 나중에 돌이켜보니 내가 뭔가를 시작할 때마다 그 순서대로 움직이고 있었다.
그때그때 다른 말을 하신 게 아니라 늘 같은 얘기를 하셨다는 게 중요했던 것 같다.
사람이 같은 말을 반복해서 들으면 어느 순간 그게 자기 생각처럼 되어버린다.
그리고 한 가지 더.
선택과 집중을 하라는 말씀도 늘 하셨다.
욕심이 많으면 전부 어중간해진다고, 그래서 선택이 먼저고 집중은 그다음이라고.
그 말대로 처음에는 품목을 늘리지 않고 하나만 제대로 하기로 했다.

■ 시골에서 사업자를 내다.
2017년 7월 1일, 사업자등록을 마쳤다.
사업자를 내는 절차 자체는 서울에서도 여러 번 해본 일이라 덤덤했다.
창구에 앉아 서류를 쓰면서도 손이 익어 있었다.
그런데 내심 기대가 컸다.
또 새로운 경험을 시작할 수 있다는 생각에 들뜬 마음이 없지 않았다.
무엇보다 이번에는 혼자가 아니라는 사실이, 예전과는 다른 종류의 안정감을 줬다.
업종을 적는 칸에서 잠깐 멈췄다.
온라인으로 농산물이나 약초 관련 물건을 팔 거라고 하니 직원분이 몇 가지를 짚어주셨고, 나중에 추가하려면 또 와야 하니 처음에 넉넉히 넣어두라는 얘기도 들었다.
그 말이 맞았다.
그 뒤로 몇 해 동안 하는 일이 계속 늘었는데, 그때 넣어둔 것들이 대부분 쓸모가 있었다.
사업장 주소는 내가 사는 집 주소를 적었다.
사무실이 따로 있을 리가 없었다.
통신판매업 신고도 그 무렵에 같이 해뒀다.
예전에는 서류를 들고 나올 때 어깨에 뭔가가 얹히는 기분이었다.
이번에는 그게 없었다.
같은 종이 한 장인데 들고 나오는 기분이 달랐다.
차에 타서 한참 들여다봤다.
반년 조금 전에 눈 내리는 날 팔복이를 태우고 이 동네로 들어왔다.
그 사이에 회사를 두 번 들어갔다 나왔고, 빌린 집을 고쳤고, 산을 탔고, 사람을 만났다.
그러고 나서 내 이름이 다시 올라간 종이 한 장을 받아 들고 앉아 있었다.
집에 도착해 마당에 들어서니 팔복이가 늘 하던 대로 뛰어나왔다.
그 종이를 녀석 앞에 흔들어 보이면서 혼잣말을 했던 것 같다.
녀석은 당연히 아무 반응이 없었고, 꼬리만 흔들다가 마당 한 바퀴를 돌고 왔다.
그날 저녁에는 아무것도 안 하고 그냥 마루에 앉아 있었다.
■ 더○○이라는 이름
상호명은 더○○.
이 이름도 조 대표님의 제안이었다.
시골 인심을 그대로 담아주면서, 항상 조금 더 가득 채워 드려라.
그러면 그게 다 돌아오게 되어 있다고.
베푸는 만큼 돌아온다는 이야기를 나누던 중에 나온 이름이었다.
어감이 좋았고, 왠지 우리와 딱 맞는다는 느낌이 들어 그 자리에서 회사명으로 정했다.
그 자리에서 정했다는 말이 가볍게 들릴 수도 있는데, 실제로 그랬다.
며칠을 붙들고 고민한 이름이 아니라 대화 끝에 나온 이름이었다.
그런데 그 뒤로 한 번도 바꿀 생각을 한 적이 없다.
오히려 시간이 갈수록 그 이름이 나를 잡아줬다.
저울에 달 때 조금이라도 더 얹을까 말까 망설이는 순간이 있다.
그럴 때마다 상호가 생각났다.
이름을 그렇게 지어놓고 덜 담으면 그건 내가 내 간판에 거짓말을 하는 거다.
처음엔 그게 손해인 것 같았다.
백 그램 팔면서 백십 그램이 나가면 그만큼이 그냥 나가는 거니까.
그런데 몇 달 지나니 그게 아니었다.
그래서 늘 조금 더 담았다.
그게 손해인 것 같지만 아니었다.
받아본 사람이 다시 주문하고, 그 사람이 또 다른 사람한테 얘기한다.
베푸는 만큼 돌아온다는 그 말이 장사에서 실제로 돌아가는 방식이라는 걸, 몇 해 지나서야 숫자로 확인했다.
이름을 잘 지어주셨다는 생각을 그래서 지금도 한다.
이름이라는 게 그냥 부르는 말이 아니라 사람을 어떤 방향으로 밀어주는 거라는 걸 그때 알았다.
멋있는 이름을 지었으면 멋있어 보이려고 애썼을 거다.
더 담으라는 이름을 지어놓으니 담는 쪽으로 손이 갔다.
그 차이가 몇 해 쌓이면 꽤 멀리 벌어진다.

■ 다시 시작한다는 것
돌아보면 그 몇 달 사이에 내가 한 일은 별로 없다.
생각을 꺼내 말했고, 들었고, 적었고, 따라갔다.
그게 전부다.
그런데 그 순서가 전과 완전히 달랐다.
예전에는 하고 싶은 걸 먼저 벌이고 나머지를 뒤에서 수습했다.
이번에는 준비를 먼저 하고 그다음에 벌였다.
같은 사람이 같은 일을 하는데 순서 하나로 결과가 달라진다는 걸, 나는 마흔이 넘어서 알았다.
그걸 혼자 깨달은 게 아니라는 것도 분명히 적어두고 싶다.
옆에서 그 순서를 짚어준 사람이 있었기 때문이다.
혼자였으면 그해 칠월에 사업자를 낼 생각조차 하지 못했을 거다.
냈다 하더라도 예전처럼 벌여놓고 뒤에서 수습하는 방식이었을 거고, 그러면 결과는 뻔했다.
그러니 그 종이 한 장은 내가 받은 거지만 내가 만든 건 아니었다.
사업자등록증을 받은 그날 저녁, 마당에 앉아 한참 산을 봤다.
저 산에서 넉 달 동안 지게를 졌다.
이제는 저 산에서 나오는 걸 어떻게 팔 것인가를 생각하는 자리에 앉아 있었다.
같은 산인데 보는 각도가 달라져 있었다.
팔복이가 옆에 와서 엎드렸다.
그날은 일찍 잤다.
다음 날 아침에 눈을 뜨니 기분이 이상했다.
공장에 안 가도 되는데 갈 데가 생긴 느낌이었다.
혼자 일한다는 건 아무도 시키지 않는다는 뜻이고, 그건 아무도 안 해줘도 된다는 뜻이기도 하다.
그 둘 사이에서 자기를 세우는 게 혼자 하는 사람의 유일한 일이라는 걸 그 무렵부터 알아갔다.
그래서 일어나는 시간만큼은 공장 다닐 때 그대로 두었다.
갈 데가 없어도 그 시간에 일어나 세수를 하고 책상 앞에 앉았다.
그 습관이 그 뒤 몇 해를 버티게 했다.
다음 날부터 할 일이 많았다.

"物有本末 事有終始 知所先後 則近道矣" (물유본말 사유종시 지소선후 즉근도의)
중국 고대의 경전 『대학』은 사람이 자기를 닦고 집안을 돌보고 나라를 바르게 하는 순서를 설명하면서 이 구절을 앞머리에 놓았다.
천하를 바르게 하려는 사람은 먼저 자기 나라를 다스리고, 나라를 다스리려면 먼저 집안을 가지런히 하고, 집안을 가지런히 하려면 먼저 자기 몸을 닦고, 몸을 닦으려면 먼저 마음을 바로 하라는 식으로 단계를 거꾸로 짚어 내려간다.
그렇게 끝에서부터 되짚어 보면 지금 당장 손대야 할 일이 무엇인지가 저절로 드러난다는 것이다.
그 설명 끝에 "모든 것에는 뿌리와 끝이 있고 모든 일에는 끝과 시작이 있으니, 먼저 할 것과 나중에 할 것을 알면 도에 가깝다"는 위의 말이 붙어 있다.
— 『대학(大學)』 경일장. 유가의 사서 중 하나로, 본래 『예기』의 한 편이었다가 송나라 때 독립된 경전으로 정리되었다.
무엇을 하느냐보다 무엇을 먼저 하느냐가 일의 성패를 가른다는 뜻이다.
순서를 지키면 더딘 것 같아도 결국 한 번에 가고, 순서를 건너뛰면 빨라 보여도 되돌아와 다시 하게 된다.
그러니 서두르는 사람보다 순서를 아는 사람이 늘 먼저 도착한다.
같은 일을 두 번째로 시작하면서 순서부터 바꿔본 그해가, 나한테는 그 말을 몸으로 배운 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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