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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소한 일상

[사업 시작] 담금주 키트를 만들다.

by 사람들생각 2025. 3. 17.

▣  옮겨온 글 ▣

예전 블로그에 써두었던 글을 옮겨 왔다. 문장은 그때 그대로 두고, 읽기 편하게 조금만 매만졌다.


 

고정 수입이 생기니 머릿속에 여유가 생겼다.

여유가 생기니 그제야 다음 생각이 들어왔다.

사람이 쫓기고 있을 때는 새로운 게 떠오르지 않는다는 걸 그때 알았다.

이번 달에 얼마가 들어올지 알 수 없는 상태로 몇 달을 지내보면 안다.

머리가 전부 그 걱정에 쓰이고 나면 남는 게 없다.

고정으로 나가는 자리가 생기고 나서야 비로소 다음 걸 생각할 자리가 생겼다.

 

탈곡기가 탈곡하는 모습



■ 원물만으로는 안 된다

원물을 그대로 소분해 파는 데는 한계가 있다는 걸 몇 달 하면서 알았다.

약초를 사다가 집에서 달여 드시는 분들은 이미 사는 데가 정해져 있는 경우가 많았다.

새로 사보려는 사람한테 원물은 문턱이 높다.

얼마를 넣어야 하는지, 몇 시간을 달여야 하는지 모르면 선뜻 손이 안 간다.

조금 더 퀄리티가 있는 제품, 받아서 바로 쓸 수 있는 제품을 팔고 싶었다.

그런데 공장도 설비도 없는 상태에서 가공을 할 수는 없었다.

그 사이에서 한참을 맴돌았다.

설비를 갖추려면 공장이 있어야 하고, 공장을 지으려면 땅이 있어야 하고, 그 앞에 또 거쳐야 할 게 줄줄이 있었다.

그때 내 형편에서는 꺼낼 수 있는 얘기가 아니었다.

그러면 지금 가진 걸로 할 수 있는 게 뭔가.

그 질문을 며칠 들고 다녔다.

산에 올라가면서도 생각했고 저녁에 마당에 앉아서도 생각했다.

공책에 이것저것 적어봤는데 대부분 설비가 필요한 것들이었다.

줄을 그어가며 지우다 보니 남는 게 몇 개 없었다.

그러다 생각이 하나 떠올랐다.

가공을 안 해도 되는 제품을 만들면 되는 거였다.

담금주 키트였다.

 

 

비닐 포장 밀봉기



■ 담그는 집은 많은데

시골에 내려와서 알게 된 것 중 하나가 담금주를 담그는 집이 생각보다 많다는 거였다.

어르신들 댁에 가면 마루 한쪽이나 뒤란에 커다란 병이 몇 개씩 놓여 있었다.

안에 뭐가 들었는지 물어보면 설명이 길게 나왔다.

그걸 보면서 든 생각이, 담그고 싶은 사람은 많은데 뭘 얼마나 넣어야 하는지 모르는 사람도 많겠다는 거였다.

주변에 물어보니 정말 그랬다.

담가보신 분들은 열이면 열 자기 방식이 있었고, 안 담가보신 분들은 열이면 열 어려워 보인다고 하셨다.

어려워 보인다고 하신 분들 얘기가 더 쓸모 있었다.

무엇이 어려운지를 하나씩 물어보니 답이 거의 같았다.

뭘 얼마나 넣는지 모르겠다, 병을 어디서 사는지 모르겠다, 언제까지 두는지 모르겠다.

세 가지였다.

그 세 가지를 없애주면 되는 거였다.

덧붙여서 하나 더 있었다.

담가놓고 몇 달이 지나면 자기가 뭘 담갔는지 잊어버린다는 것.

그건 아무도 입 밖에 내지 않았는데 집집마다 그랬다.

그 네 가지를 머릿속에 넣고 구성을 짰다.

약초가 전부 병 안에 들어 있어서, 소비자는 담금주용 소주만 부으면 되는 구성.

그렇게 정했다.

가공을 하는 게 아니라 원물을 담아서 보내는 것이니 다른 자격이 필요 없었다.

내가 그때 할 수 있는 최대치가 딱 거기까지였다.

형편에 맞는 물건을 찾아낸 셈인데, 돌아보면 그 제약이 오히려 물건을 단순하게 만들어줬다.

할 수 있는 게 적으면 고민할 것도 적어진다.

뭘 더 얹을까를 고민하는 대신 뭘 더 덜어낼까를 고민하게 된다.

그때 만든 것들이 지금 봐도 군더더기가 없는 이유가 그거다.




■ 팔 리터짜리 파란 병

병부터 골랐다.

플라스틱 담금주 병 중에 팔 리터짜리가 있었다.

뚜껑이 파란색이고 몸통은 투명한, 시골 어디서나 보이는 그 병이다.

유리병도 알아봤는데 무거워서 택배로 보내기가 어려웠다.

깨지면 안에 든 것까지 다 버려야 하고, 받는 사람도 들고 옮기기가 힘들다.

플라스틱 쪽이 가볍고 안전했다.

팔 리터면 소주를 넉넉히 부어도 여유가 있는 크기라 한 집에서 담그기에 딱 맞았다.

병이 도착한 날 하나를 꺼내 물을 가득 채워봤다.

들어보니 꽤 묵직했다.

받는 분이 현관에서 한 번 들어 올려야 하는 무게라, 상자를 고를 때 손잡이 구멍이 있는 쪽으로 알아봤다.

뚜껑도 전부 열어보고 닫아봤다.

수십 개 중에 몇 개는 입구가 미세하게 어긋나 있었다.

그걸 모르고 보냈으면 그 집에서 술이 샜을 거다.

그 뒤로는 보내기 전에 병을 하나하나 손으로 확인하는 게 습관이 됐다.

손이 많이 가는 일인데 그걸 안 해서 생기는 일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다.

술이 새서 상자가 젖어 도착하면 그 집은 그걸로 끝이다.

미안하다는 말로 돌아오지 않는다.

상자도 몇 번 바꿨다.

처음 쓰던 상자는 병이 안에서 조금씩 움직였다.

완충재를 더 넣으면 해결되는데 그러면 부피가 커지고 택배비가 올라간다.

결국 병 크기에 딱 맞는 상자를 따로 맞춰서 썼다.

그 결정을 하기까지 몇 달이 걸렸다.

 

야관문 담금주 키트




■ 야관문 주

처음 만든 게 야관문 주였다.

구성은 건조 야관문 사백 그램, 건조 당귀 삼백 그램, 감초 오십 그램이었다.

야관문만 넣으면 맛이 거칠다.

당귀를 같이 넣으면 향이 잡히고, 감초를 조금 넣으면 끝맛이 둥글어진다.

이 비율은 혼자 정한 게 아니라 아는 분들께 묻고 다녀서 잡았다.

약초를 오래 다루신 분들은 각자 자기 비율이 있었고, 같은 재료를 두고도 조금씩 달랐다.

몇 개를 모아놓고 보니 공통되는 선이 보였고, 그 안에서 제일 무난한 쪽으로 정했다.

처음 담그는 사람이 담가도 실패하지 않는 비율이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전문가를 위한 게 아니라 처음 담그는 사람을 위한 물건이었으니까.

이름도 어렵게 짓지 않았다.

재료 이름을 앞에 두고 뒤에 주를 붙였다.

야관문 주.

검색해서 들어오는 사람이 찾는 건 결국 재료 이름이라 그렇게 갔다.

저울은 소분할 때 쓰던 걸 그대로 썼다.

그램 단위까지 나오는 걸로 골라둔 게 여기서도 쓸모가 있었다.

같은 이름으로 파는 물건이 집마다 양이 다르면 그건 상품이 아니다.

눈대중으로 해도 될 것 같지만 그러면 안 된다.

여기서도 늘 조금씩 넉넉한 쪽으로 맞췄다.

상호가 그런 이름인데 덜 담으면 말이 안 되기도 했다.



직접 만든 상품 라벨

 

■ 라벨에 적어 넣은 것들

물건보다 더 오래 붙들고 있었던 게 라벨이었다.

병에 붙일 스티커 하나인데, 거기 뭘 적어야 하는지가 계속 바뀌었다.

처음엔 이름과 구성만 적으면 된다고 생각했다.

써놓고 보니 받는 사람이 궁금할 것들이 자꾸 떠올랐다.

언제 담갔는지를 적어둘 데가 없으면 몇 달 뒤에 본인도 모른다.

어르신 댁에서 본 장면이 떠올랐다.

뒤란에 병이 몇 개 서 있는데 언제 담근 건지 아무도 모르셨다.

저건 재작년 거고 저건 작년 건가 보다 하시는데 확실하지가 않았다.

담근 날을 모르면 건질 때도 모른다.

그래서 라벨에 빈칸을 만들었다.

담근 날, 건질 날, 소주 도수와 양을 직접 적어 넣게 했다.

볼펜으로 쓱 적어두면 그게 그 집 기록이 되는 거였다.

라벨은 직접 라벨지를 구입해서 프린터로 제작을 했다.

몇번의 시행 착오 끝에 병에 맞는 라벨을 만들 수 있었다.

손으로 적을 칸이 있는데 그 칸이 작으면 볼펜이 안 들어간다.

써보지 않고는 모르는 게 그런 거다.

설명은 딱 세 줄만 넣었다.

담그고 난 뒤 삼 개월이 지나면 약초를 건져내고 드시면 된다는 것, 오래 둘수록 좋아진다는 것, 하루에 한 잔씩 드시면 된다는 것.

효능을 길게 늘어놓고 싶은 마음이 왜 없었겠나.

그런데 그런 건 내가 함부로 적을 말이 아니라고 생각했고, 그 판단은 지금 봐도 잘한 일이었다.

라벨 구석에 건져내는 날을 적는 칸을 하나 더 만들고 거기에 작은 하트를 넣었다.

담금주라는 게 결국 누군가를 생각하면서 담그는 거라서, 그 날짜가 기다리는 날이 되면 좋겠다는 생각이었다.

오른쪽에는 로고와 함께 한 줄을 올렸다.

자연을 처방하는.

약방이라는 말을 쓰기로 한 이상 처방이라는 말이 자연스럽게 따라왔다.

산 모양 위에 작은 십자 하나를 올린 그 로고도 그때 만들었다.

그리고 한쪽에 작은 QR코드를 하나 넣었다.

병을 받아놓고 몇 달이 지나면 어디서 샀는지 기억이 안 난다.

그때 병에 코드가 붙어 있으면 한 번에 찾아올 수 있다.

그 작은 거 하나 넣는 데 하루를 썼다.

처음 완성된 라벨을 병에 붙여놓고 한참 봤다.

삐뚤어지게 붙어서 떼고 다시 붙였다.

몇 번 하고 나니 손에 익어서 한 번에 똑바로 붙게 됐다.

그날 만든 첫 병은 팔지 않고 한참 두고 봤다.



온라인 주문이 늘어남

 

■ 주문이 늘기 시작하다

이 제품을 내놓고 나서 온라인 주문이 눈에 띄게 늘었다.

원물만 올려놓았을 때와 반응이 달랐다.

담그고 싶었는데 엄두가 안 났던 사람들이 들어왔다.

문의도 달라졌다.

전에는 얼마를 넣느냐는 질문이 많았는데, 그 질문이 사라졌다.

병 안에 이미 다 들어 있으니 물을 게 없었던 거다.

사람의 수고를 하나 덜어주는 것, 그게 값이 된다는 걸 그때 숫자로 봤다.

원물을 팔 때는 내가 재료를 넘기는 사람이었다.

키트를 팔면서부터는 그 사람이 해야 할 일을 줄여주는 사람이 됐다.

같은 약초를 쓰는데 하는 일이 달라진 거였다.

그 차이만큼이 값으로 돌아왔다.

그러고 보면 장사라는 게 결국 그거였다.

남의 수고를 얼마나 덜어주느냐.

재료를 넘기는 데서 멈추면 재료값만 받고, 수고를 덜어주면 그 수고값까지 받는다.

도매상에 포대로 넘길 때는 그 자리가 아예 없었다.

무게와 시세만 있었다.

그 뒤로는 재료를 바꿔가며 다른 키트도 만들었다.

무엇을 넣느냐에 따라 이름이 달라지고 비율이 달라졌는데, 만드는 방식은 처음 그대로였다.

병은 같은 걸 쓰고 라벨 양식도 같은 걸 쓰고 설명의 뼈대도 같은 걸 썼다.

처음 하나를 만드는 데 몇 주가 걸렸는데 두 번째는 며칠이면 됐다.

그게 틀을 제대로 만들어 두는 일의 값이다.

처음에 대충 해놨으면 매번 처음부터 다시 해야 했을 거다.

 




"窮則變 變則通 通則久" (궁즉변 변즉통 통즉구)

 

중국 고대의 경전 『주역』은 세상 만물이 끝까지 가면 반드시 모양을 바꾸고, 바꾸고 나면 다시 길이 열리며, 길이 열리면 오래간다고 설명한다.

옛사람들은 계절이 도는 것을 그 예로 들었다.

겨울이 깊어 더 추워질 데가 없을 때 비로소 봄으로 돌아서고, 그렇게 돌아선 뒤에야 다시 한 해가 이어진다는 것이다.

그래서 막다른 데에 이른 것을 끝이라 보지 않고, 바꿀 때가 되었다는 신호로 읽으라는 뜻으로 이 말을 썼다.

 

— 『주역(周易)』 계사전(繫辭傳) 하편. 중국 고대의 경전으로, 변화의 이치를 풀이한 책이다.

 

막혔다는 것은 끝났다는 뜻이 아니라 방식을 바꿀 때가 되었다는 뜻이다.

같은 자리에서 더 세게 밀기보다 모양을 한 번 바꿔보는 쪽이 길을 여는 경우가 많다.

다만 바꿀 거리를 평소에 들여다보고 있던 사람만 그때 바꿀 수 있다.

 

원물이 더는 안 나가던 그 몇 달이, 지나고 보니 바꿀 때를 알려준 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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