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옮겨온 글 ▣
예전 블로그에 써두었던 글을 옮겨 왔다. 문장은 그때 그대로 두고, 읽기 편하게 조금만 매만졌다.
내려올 때 나는 다시는 사업을 벌이지 않겠다고 다짐했었다.
그 다짐이 흔들리기 시작한 건 거창한 이유 때문이 아니었다.
저울 앞에 서 있던 어느 날, 아주 사소하고 반복적인 장면 하나 때문이었다.
■ 저울 앞에서
우리가 산에서 해온 것들은 결국 도매상으로 넘어갔다.
껍질을 벗겨 건조장에 널고, 마른 것을 기계로 자르고 건조기에 넣어 말린 다음, 선별해서 포대에 담는다.
그 과정을 다 우리 손으로 했다.
채취부터 건조, 가공까지 전부 같은 사람들이 하는 거니까 물건에 자신이 있었다.
그런데 그 좋은 물건이 거의 전부 도매로 나갔다.
한 달 가까이 산을 오르내리며 벗기고 말리고 묶은 것들이 트럭에 실려 나가는 날은 아침부터 분위기가 조금 들떠 있었다.
한 달 동안 몸으로 한 일이 눈앞에서 숫자로 바뀌는 날이니까 다들 손이 빨랐다.
그런데 막상 물건을 넘기는 자리에 서 있어 보면 기분이 금방 가라앉았다.
저울에 올리기도 전에 상태가 어떻다느니 요즘 시세가 어떻다느니 하는 말이 먼저 나왔고, 값은 늘 우리가 생각한 것보다 아래에서 정해졌다.
그 과정에 우리가 들인 시간은 한 번도 계산에 들어가지 않았다.
산비탈을 몇 번 오르내렸는지, 누가 어디를 다쳤는지, 비 소식에 건조장을 몇 번이나 들락거렸는지는 그 자리에서 아무 의미가 없었다.
값을 정하는 사람은 눈앞에 쌓인 물건만 봤다.
그게 당연한 거라고들 했다.
기분이 나빠도 뾰족한 수가 없었다.
팔 곳이 거기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그쪽에서 안 받겠다고 하면 그 많은 물건을 어디로 가져갈 데가 없었다.
그걸 서로 아는 상태에서 값을 정하니 애초에 대등한 자리가 아니었다.
물건이 좋아도 소용없고 일을 열심히 해도 소용없었다.
어디에 파느냐가 전부를 정하고 있었다.
저게 소매로 나갈 수만 있으면 진짜 돈이 될 텐데, 하는 생각을 그 마당에서 몇 번이나 했다.

■ 말이 줄어드는 저녁
그런 날 저녁 술자리는 유난히 조용했다.
누군가 한마디 하면 다 같이 욕을 한번 하고, 그러고는 또 조용해졌다.
결론이 안 나는 얘기라는 걸 다들 알았으니까.
나는 그 조용함이 제일 마음에 걸렸다.
사람들이 일을 못 해서 돈을 못 버는 게 아니었다.
그 산에서 그만큼 몸을 쓰는 사람들이 그만큼도 못 받는 이유가 일하는 사람 쪽에 있지 않다는 게 분명히 보였다.
처음 몇 번은 그게 원래 그런 거라고 생각했다.
우리가 하는 건 캐고 벗기고 말리는 일이고, 값은 그걸 받는 쪽에서 정하는 일이라고.
그런데 몇 달 같은 장면을 반복해서 보니까 생각이 달라졌다.
값을 깎는 쪽도 악의가 있었던 건 아닐 거다.
그쪽도 받아서 다시 넘기는 자리였고, 자기 이윤을 남겨야 하는 사람이었다.
다만 그 구조 안에서 제일 끝에 서 있는 사람이 우리였다.
끝에 서 있으면 앞에서 정한 걸 그대로 받는다.
어디에 팔면 되는지를 아는 사람이 그 자리에 없었던 것도 컸다.
다들 산에서 하는 일은 누구보다 잘했다.
어느 계절에 무엇이 나오고 어떤 걸 좋은 물건으로 보는지, 그건 몸에 다 들어 있었다.
그런데 그걸 누구에게 어떻게 내놓는지는 아무도 몰랐다.
만드는 손은 다 있는데 파는 손이 없는 자리였다.
그 생각이 든 순간부터 저울 앞 장면이 다르게 보였다.
억울한 일이 아니라 비어 있는 자리처럼 보이기 시작했다.
집에 돌아와 마당에 들어서면 팔복이가 늘 하던 대로 뛰어나왔고, 그 녀석 등을 쓸면서 혼자 생각이 많아지던 밤이 그 무렵에 자주 있었다.

■ 흔들리던 다짐
그러면서 내 안에서 뭔가가 조금씩 움직이기 시작했다.
저 물건을 내가 직접 팔면 어떨까 하는 생각이었다.
파는 데가 하나뿐이라 끌려가는 거라면, 파는 데를 하나 더 만들면 되는 것 아닌가.
그 생각까지는 어렵지 않게 갔다.
문제는 그다음이었다.
그 생각이 들자마자 스스로 눌렀다.
다시는 사업자를 내지 않겠다고 했던 게 불과 몇 달 전이었다.
그래놓고 또 시작하는 건 아무래도 아니다 싶었다.
그런데 누르면 누를수록 더 또렷해졌다.
그래서 결국 나는 나한테 유리한 쪽으로 말을 바꿨다.
크게 하는 게 아니라 내 밥벌이 정도만 하는 거라면, 그 정도는 괜찮지 않나.
시골 생활은 그대로 누리면서 먹고살 만큼만 하는 거라면 다를 거라고.
지금 생각하면 그건 합리화였는데 그때는 꽤 그럴듯하게 들렸다.
사람이 하고 싶은 일이 생기면 그 일을 해도 되는 이유를 기가 막히게 잘 찾아낸다.
나도 그랬다.
다만 그 합리화 끝에 실제로 움직이기 시작했으니, 아주 나쁜 합리화는 아니었던 것 같다.
밤에 마당에 앉아 종이에 뭘 적어본 날도 있었다.
무엇을 팔 수 있을까, 그걸 어디에 올릴까, 사진은 어떻게 찍을까.
적어놓고 보면 전부 모르는 것뿐이었는데, 모르는 걸 적어놓는 것만으로도 밤이 덜 답답했다.
읍내에 나가 문구점에서 공책 하나를 샀다.
거기에 들은 얘기와 알아볼 것들을 적기 시작했는데, 그 공책을 그 뒤로 몇 년을 들고 다녔다.

■ 그 얘기를 꺼내던 날
그 무렵 그분이 또 공장에 들르셨다.
저녁 자리에서 자연스럽게 도매상 얘기가 나왔고, 다들 한마디씩 하는 분위기였다.
그분은 한참 듣기만 하시다가 나한테 물으셨다.
그러면 어디에 어떻게 팔면 제값을 받을 수 있을 것 같냐고.
그 질문이 나한테 올 줄은 몰랐다.
그 자리에서 제일 말수가 적은 사람이 나였으니까.
내가 예전에 온라인으로 물건을 팔아본 적이 있다고 말씀드린 건 그때였다.
국내 오픈마켓에도 올려봤고, 해외 이베이에서 의류를 팔아본 적도 있다고.
사진 찍고 설명 붙이고 주문 받고 보내는 일이 어떤 건지는 대충 안다고 했다.
물건이 좋아도 사진이 별로면 안 팔린다는 것, 설명을 어떻게 쓰느냐로 문의가 달라진다는 것, 포장이 허술하면 반품이 는다는 것.
그런 걸 몸으로 겪어봤다고 말씀드렸다.
그 말을 들으시더니 표정이 달라졌다.
그러면 그걸 여기 물건에 그대로 해보면 되지 않겠냐고 하셨다.
산에서 나오는 건 이미 있고 파는 방법을 아는 사람이 여기 있는데 왜 안 하냐는 식이었다.
나는 그 자리에서 바로 대답을 못 했다.
머릿속으로만 돌리던 걸 남의 입으로 들으니까 생각보다 묵직했다.
혼자 생각할 때는 그냥 공상이었는데, 입 밖으로 나오고 누가 받아주니까 갑자기 해야 할 일 목록처럼 보이기 시작했다.
그날 집에 돌아와서 늦게까지 잠이 안 왔다.
다시는 안 하겠다고 했던 말과 저울 앞에서 본 장면이 머릿속에서 계속 부딪쳤다.
결국 내가 정리한 건 하나였다.
예전처럼 크게 벌이는 건 안 하고, 내 손으로 들고 갈 수 있는 크기만 하는 것.
그 선을 넘지 않으면 괜찮을 거라고 생각했다.
실제로 그 선을 지켰느냐는 다른 얘기지만, 그때 그 선을 그어둔 건 잘한 일이었다.
선을 그어두면 넘을 때 적어도 넘는 줄은 알게 되니까.

■ 등을 돌리지 않고 나오는 법
그 뒤로 몇 번 더 그 얘기가 오갔다.
그분은 올 때마다 조금씩 더 구체적으로 물으셨다.
뭘 먼저 준비해야 하는지, 어디서부터 알아보면 되는지를 짚어주셨고 나는 그걸 받아 적었다.
서두르지 말라는 말씀도 하셨다.
준비가 덜 된 상태로 뛰어들면 처음 몇 달에 다 까먹는다고, 그러니 순서를 지키라고.
그 말이 그때는 답답했는데 나중에 보니 맞는 말이었다.
결국 육월 말에 공장을 그만뒀다.
사업자를 내기 위해서는 불가피한 일이었다.
나는 그 공장에서 나오는 물건을 가져다 파는 쪽이 됐고, 그 관계는 그 뒤로도 한참 이어졌다.
그쪽은 만드는 걸 하고 나는 파는 걸 하는 식이었으니, 서로 아쉬울 게 없는 구조였다.
계약서를 쓰고 조건을 따진 적도 없다.
그 마당에서 같이 막걸리를 마셔본 사이라는 게 계약서보다 셌다.
동업이라는 말을 쓰면 좀 거창한데, 실제로는 그냥 서로 도와주는 관계였다.
그런 관계가 오래 가려면 돈 계산이 깨끗해야 한다는 것도 그때 경험했다.
마지막 날 짐을 챙겨 나오면서 작업장 뒤편 그늘을 한 번 돌아봤다.
넉 달 동안 거기 쪼그려 앉아 믹스커피를 마셨다.
지게 지는 법을 배웠고, 주걱으로 두충 껍질을 벗겨봤고, 벚꽃길 끝의 도라지밭에 다녀왔다.
그리고 그분을 만났다.
그 넉 달이 없었으면 나는 그다음을 시작하지 못했을 거다.
집에 돌아와 마당에 서 있는데, 이제 당분간 출근할 데가 없다는 사실이 그제야 실감이 났다.
무섭기보다는 이상하게 조용했다.
내려올 때는 쫓겨 내려오는 기분이었는데, 그 넉 달을 지나고 나니 처음으로 내가 뭘 해보겠다고 마음을 먹은 상태로 그 마당에 서 있었다.
같은 마당이고 같은 집인데 서 있는 사람이 달라져 있었다.
팔복이가 옆에 와서 앉았고, 나는 그 녀석 머리를 쓸면서 한참 산 쪽을 봤다.
칠월부터 할 일을 그날 밤에 적기 시작했다.
"生我者父母 知我者鮑子也" (생아자부모 지아자포자야)
중국 춘추시대 제나라의 관중과 포숙아는 젊을 때 함께 장사를 했는데, 관중이 이익을 더 챙겨 가도 포숙아는 그 집이 가난한 것을 알기에 한 번도 탓하지 않았다.
관중이 전쟁터에서 세 번 달아났을 때도 겁쟁이라 하지 않고 노모가 계신 사정을 먼저 헤아렸다.
훗날 두 사람은 왕위를 다투는 서로 다른 형제를 섬기게 되었고, 포숙아가 섬긴 쪽이 이겨 환공이 되자 관중은 포로가 되어 죽을 처지에 놓였다.
그때 포숙아는 자신이 받을 재상 자리를 사양하고 관중을 그 자리에 앉히라고 환공에게 청했고, 관중은 재상이 되어 제나라를 천하의 패자로 만들었다.
뒷날 관중이 남긴 위의 말은 "나를 낳아준 사람은 부모지만 나를 알아준 사람은 포숙아였다"는 뜻이다.
— 사마천(司馬遷, 기원전 145?~86?). 중국 한나라의 역사가. 『사기(史記)』 관안열전(管晏列傳).
사람이 때를 얻는 건 혼자 힘으로 되는 일이 아니라, 자기를 알아봐 주는 사람을 통해서 열린다는 뜻이다.
다만 알아봐 줄 것이 없는 사람에게는 그 자리가 오지 않으니, 결국 알아볼 만한 무언가를 미리 쌓아두고 있어야 하는 셈이다.
그러니 사람을 찾기 전에 내 안에 무엇이 들어 있는지를 먼저 챙겨두는 게 순서다.
내가 예전에 물건을 팔아봤다는 그 한마디도, 그날 그 자리가 아니었으면 꺼낼 일이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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