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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소한 일상

[시골 정착] 마당이 있는 집

by 사람들생각 2025. 3. 16.

▣  옮겨온 글 ▣

예전 블로그에 써두었던 글을 옮겨 왔다. 문장은 그때 그대로 두고, 읽기 편하게 조금만 매만졌다.


 

누군가 문경에서 보낸 시간 중에 언제가 제일 좋았냐고 물으면, 나는 망설이지 않고 그 보름 남짓을 꼽는다.

번듯하게 해놓은 것도 없고 통장에 남은 것도 별로 없던 때였는데, 이상하게 그 시절만 떠올리면 지금도 입꼬리가 먼저 올라간다.

 

텃밭에서 새 생명이 싹틈



■ 일을 그만두던 날

여사님의 빈집으로 이사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문경에 와서 처음 다니던 회사를 그만두기로 했다.

이유는 여기 적지 않으려 한다.

한 달 보름 남짓한 짧은 시간이었지만, 아무 연고도 없던 나와 팔복이를 받아준 곳이라는 사실은 변하지 않는다.

처음 일주일 동안 눈을 쓸고 난로에 불을 붙이던 아침들도 고마운 기억으로 남아 있다.

2월 중순, 마지막 출근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그런 생각이 들었다.

이제 정말 나와 팔복이, 그리고 이 집뿐이구나.

불안해야 맞는 상황이었는데, 마당에 차를 대는 순간 꼬리를 흔들며 달려 나오는 녀석을 보니 그런 마음이 쑥 들어갔다.

통장 잔고를 떠올리면 한숨부터 나오는 게 맞았다.

집세가 들지 않는다는 것, 그리고 아끼면 한두 달은 버틸 수 있다는 것.

그게 그때 내가 가진 계산의 전부였다.

다음 일은 그다음에 생각하기로 했다.

대신 이 집에 있는 동안만큼은, 그동안 팔복이에게 진 빚을 조금이라도 갚고 싶었다.

그 전에 이 집부터 제대로 사람 사는 집으로 만들어야 했다.

다음 날 아침에는 알람 없이 눈을 떴다.

해가 창호지 문을 하얗게 물들이고 있었고, 마당에서 팔복이가 문 앞을 서성이며 발톱으로 마루를 긁는 소리가 들렸다.

출근할 데가 없는 아침이 이렇게 조용하구나 싶어서, 이불 속에서 한참을 그 소리만 듣고 있었다.




■ 황토벽돌과 찹쌀풀

일주일 동안 청소만 겨우 해놓은 집이라, 본격적으로 손볼 곳이 한두 군데가 아니었다.

가장 급한 건 추위였다.

도시에서는 밖이 아무리 추워도 건물 안에 들어가면 그만이었는데, 시골집은 방 안에 있어도 바닥에서 냉기가 스멀스멀 올라왔다.

고민 끝에 화목난로를 들이기로 했다.

기름보일러가 있긴 했지만, 그때 형편에 기름값을 감당하며 겨울을 나기는 어려웠다.

문틈마다 문풍지를 새로 붙이고 창문에는 비닐을 덧대 바람부터 막았다.

난로 둘레에는 황토벽돌을 쌓았고, 이음새는 시멘트 대신 찹쌀풀을 쑤어 메웠다.

찹쌀풀로 벽돌을 붙인다는 얘기를 처음 들었을 때는 반신반의했는데, 마르고 나니 생각보다 단단하게 붙어서 꽤 뿌듯했다.

연통을 지붕 밖으로 빼는 일이 생각보다 까다로워서 읍내 철물점을 몇 번이나 오갔는데, 그때마다 사장님이 이건 이렇게, 저건 저렇게 하라며 손그림까지 그려가며 알려주셨다.

솜씨 좋은 사람이 보면 웃을 모양새였겠지만, 내 손으로 처음 쌓아 올린 벽이었다.

한파가 몰아친 어느 아침에는 부엌 수도가 꽁꽁 얼어서, 헤어드라이어로 수도관을 한참 녹이고 나서야 물 한 바가지를 받을 수 있었다.

도시에서는 돈만 내면 누가 대신 해주던 일들을 하나하나 내 손으로 해결해야 했는데, 그게 귀찮기보다 이상하게 재미있었다.

저녁이면 난로 위에 고구마를 올려놓고, 껍질이 터지는 소리를 들으며 마루 끝에 앉아 있었다.

시골의 밤은 정말 깜깜해서 마당에 나가 고개를 들면 별이 쏟아질 듯 많았고, 팔복이는 그 어둠 속에서도 하얗게 빛나며 내 옆을 지켰다.

그 사이 팔복이는 내가 망치질하는 곳마다 따라와 엎드려 있다가, 심심해지면 마당을 한 바퀴 돌고 다시 돌아왔다.

그렇게 열흘 남짓, 아침에 눈을 뜨면 일어나서 고치고 해가 지면 난로 앞에 앉아 쉬는 날들이 이어졌다.



 

 

 

■ 새벽 시간의 손님

난로라는 게 그렇게 많은 나무를 먹는 줄은 몰랐다.

처음엔 집에 쌓여 있던 나무를 가져다 땠는데, 아무 나무나 태우면 되는 줄 알았던 게 문제였다.

바짝 마르지 않은 나무는 불도 잘 안 붙고 연기가 엄청나게 난다는 걸 나는 그때 처음 알았다.

어느 날 새벽, 누가 대문을 발로 차는 소리에 잠이 깼다.

두 시인가 세 시쯤이었다.

나가 보니 건너편 집 어르신이 서 계셨고, 뭘 태우길래 연기가 이렇게 나느냐며 눈이 매워서 살 수가 없다고 언성을 높이셨다.

난로 문을 열어 보여드리며 그냥 나무라고 말씀드려도 막무가내셨다.

죄송하다고 몇 번이나 고개를 숙이고 들어와서는, 그날 밤 결국 한숨도 못 잤다.

 

시골살이는 이렇게 하나씩 몸으로 배우는 거라는 걸, 그 새벽에 제대로 배웠다.

돌아보면 그 어르신 덕분에 동네에서 내 얼굴이 빨리 알려진 셈이니, 지금은 웃으며 꺼낼 수 있는 이야기가 됐다.

 



■ 들판과 산을 뛰던 날들

집이 어느 정도 모양을 갖추고 나서부터는 정말 아무 일도 하지 않았다.

아침에 문을 열어주면 팔복이는 신이 나서 마당을 가로질러 달려 나갔고, 나는 그 뒤를 따라 동네 들판으로, 뒷산으로 걸었다.

겨울 끝자락의 들판은 텅 비어 있어서, 팔복이가 아무리 멀리 뛰어가도 하얀 점 하나가 끝까지 눈에 잡혔다.

한참 앞서 달려가던 녀석은 일정한 거리가 벌어지면 꼭 멈춰 서서 내가 오는지 확인하고는 다시 내달렸다.

목줄 없이 내 무릎 옆에 붙어 걷던 녀석이, 그때만큼은 마음껏 앞서 달렸다.

나는 그걸 막지 않았다.

한 번은 산자락에서 고라니가 튀어나와 팔복이가 쏜살같이 쫓아간 적이 있었다.

덜컥 겁이 나서 이름을 크게 불렀는데, 녀석은 몇십 미터를 달려가다 말고 우뚝 멈춰 서더니 그대로 몸을 돌려 내 쪽으로 돌아왔다.

회사 뒤편 둑길에서 손바닥에 줄 자국이 나도록 연습했던 그 시간이 그 산자락에서 다 돌아오는 것 같았다.

점심때가 되면 뒷산 중턱 바위에 앉아 보온병에 담아 간 따뜻한 물로 컵라면을 불려 먹었고, 팔복이는 내 옆에 엎드려 아래 마을을 내려다봤다.

거기서 내려다보면 가은 마을이 한눈에 들어왔다.

띄엄띄엄 앉은 지붕들 사이로 연기가 가늘게 올라가고, 그 가운데 여사님 댁 마당도 손톱만 하게 보였다.

불과 두 달 전만 해도 이름조차 낯설던 동네였는데, 어느새 저 작은 마당 하나가 내가 돌아갈 곳이 되어 있었다.

해가 질 무렵이면 둘 다 흙투성이가 되어 돌아왔고, 녀석은 마루 끝에 턱을 걸치고 드러누웠다.

그 모습을 보고 있으면 괜히 웃음이 났다.

2월이 끝나갈 무렵에는 양지바른 둑에 쌓였던 눈이 녹으면서, 마른 풀 사이로 냉이며 쑥이 파릇하게 고개를 내밀었다.

바람 끝은 여전히 찼지만 햇볕만큼은 확실히 봄 쪽으로 기울어 있었다.

개울가에 앉아 녹은 눈이 졸졸 흘러내려가는 소리를 듣고 있으면, 팔복이는 물가에 코를 대고 한참을 킁킁대다가 앞발로 얼음 조각을 툭툭 건드렸다.

동네 어르신들도 어느새 팔복이를 알아보시고, 길에서 마주치면 백구 데리고 어디 가냐며 먼저 말을 거셨다.

외지 사람이던 내가 동네 사람이 되어가는 데 팔복이가 한몫 단단히 했다.

어떤 할머니는 마당 앞을 지나시다 말고 대문 너머로 팔복이를 한참 들여다보시더니, 다음 날 먹다 남은 뼈다귀를 신문지에 싸서 들고 오시기도 했다.

그런 날은 녀석보다 내가 더 신이 나서, 해가 질 때까지 대문 앞을 몇 번이나 들락거렸다.

TV 속 '나는 자연인이다'를 보며 막연히 동경하기만 하던 삶을, 어쩌다 보니 내가 살고 있었다.

생각보다 불편하고, 생각보다 춥고, 가끔은 생각보다 외로웠지만, 그 모든 걸 감안하고도 동경했던 것 이상이었다.

 

 

마당에 앉아서 나를 보는 팔복이




■ 지켜진 약속

어느 날 저녁, 마루에 앉아 마당을 뛰어다니는 녀석을 보다가 문득 예전의 그 산책길이 떠올랐다.

"지금은 이렇게 원룸 하나지만 더 좋은 데로 가자.

마당 넓은 데서 마음껏 뛰게 해줄게."

그때는 그 말이 언제 지켜질지, 정말 지켜지기는 할지 아무것도 알 수 없었다.

그사이 녀석은 낯선 집에 맡겨졌고, 홍성의 외딴 구석에 묶여 있었고, 꽁꽁 언 물그릇 옆에서 겨울을 버텼다.

그 먼 길을 돌아 결국 마당 넓은 집에 닿았다.

남의 집을 빌린 것이고, 언제까지 살 수 있을지도 모르는 집이었다.

그래도 그날 저녁만큼은 그 약속 하나는 지켰다고 말할 수 있었다.

사람들은 흔히 큰 약속을 지켜야 인생이 바뀐다고 하는데, 돌이켜보면 내게는 이 작은 약속 하나가 시작이었다.

개 한 마리에게 한 말을 지키려고 여기까지 왔고, 그 말 덕분에 버틴 날들이 생각보다 많았다.

그날 저녁 마당에 내려서 팔복이 이름을 부르자, 녀석은 마당 끝에서부터 달려와 내 왼쪽 무릎 옆에 딱 붙어 섰다.

 

 

 

■ 다시, 일을 찾아서

그렇게 보름 남짓을 보내고 나니 슬슬 현실이 보이기 시작했다.

마당은 넓어졌지만 통장은 여전히 얇았고, 난로에 들어갈 나무도 언제까지나 집에 쌓인 것으로 버틸 수는 없었다.

그러던 중 근처의 약초 가공 공장에서 사람을 구한다는 얘기를 들었다.

2월 말, 면접을 보러 가기로 했다.

이번엔 무슨 일이든 오래 버텨보자고, 그래야 이 마당도 오래 지킬 수 있다고 스스로에게 다짐했다.

 

문을 나서는 날 아침, 팔복이는 마당 한가운데 앉아 나를 배웅했다.

 




"天行健 君子以自強不息" (천행건 군자이자강불식)

 

중국 주나라 때 정리된 것으로 전해지는 『주역』은 세상 만물의 변화와 그 이치를 64개의 괘로 풀어낸 책이다.

그 첫 번째 괘인 건괘(乾卦)의 상전(象傳)에 이 구절이 실려 있다.

하늘의 운행은 하루도 쉬지 않고 굳건하게 이어지니, 군자는 이를 본받아 스스로를 강하게 하며 쉬지 않는다는 뜻이다.

옛사람들은 해와 달과 계절이 한 번도 멈추지 않고 제자리를 돌아오는 모습을 보며, 사람도 그렇게 꾸준히 자신을 단련해야 한다고 여겼다.

 

— 『주역(周易)』 건괘(乾卦) 상전(象傳). 중국 유교 경전인 삼경(三經) 중 하나.

 

좋은 때가 오기를 그저 기다리는 사람보다, 그때가 언제 오든 맞이할 수 있도록 쉬지 않고 자기를 다져온 사람이 결국 그 때를 붙잡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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