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옮겨온 글 ▣
예전 블로그에 써두었던 글을 옮겨 왔다. 문장은 그때 그대로 두고, 읽기 편하게 조금만 매만졌다.
달력은 분명 봄을 가리키는데 아침저녁으로 옷깃을 파고드는 바람은 여전히 날카롭다.
계절이 바뀌었다는 생각에 조금 가볍게 입고 나섰다가 결국 옷깃을 단단히 여미게 되는 날들의 연속이다.
환절기 감기라는 게 늘 이런 방심의 틈을 타고 찾아오듯, 계절의 경계에 서 있을 때는 언제나 조심스러워진다.

■ 아예 없던 선택지
사업자를 내고 한 해쯤 지난 무렵이었다.
원물을 소분해 팔다가 담금주 키트를 내놓고 티백까지 붙이면서, 손이 모자랄 정도로 주문이 밀려들던 때였다.
그 무렵 하루가 어떻게 갔는지 모르겠다.
아침에 일어나면 주문을 확인하고, 낮에는 약초를 고르고 소분하고, 저녁에는 포장을 하고 택배를 묶었다.
부직포에 약초를 담는 일이 끝나지 않아서 밤을 새서 하는 날도 있었다.
수입이 자리를 잡아가고 있었으니 불만은 없었다.
다만 그 구조로 어디까지 갈 수 있을지는 생각해본 적이 없었다.
물건을 받아다 소분하고 담아 파는 일이었고, 내 손이 멈추면 전부 멈추는 구조였다.
그 무렵 조 대표님이 한마디를 꺼내셨다.
귀농해서 창업하는 사람한테 나라에서 자금을 지원해주는 제도가 있으니 한번 알아보라고.
나는 그 자리에서 손사래를 쳤다.
귀농창업지원사업이라는 게 있다는 건 그날 처음 들었다.
정확히 말하면 그런 제도가 있다는 사실 자체를 몰랐던 게 아니라, 그게 나와 상관있는 일이라고 생각해본 적이 없었다.
신용 문제로 한 번 크게 넘어진 경험이 있었기에, 공공의 지원이라는 것은 나와는 다른 세상의 이야기라 여기며 일찌감치 선을 긋고 살았다.
그런 건 신용이 깨끗한 사람들이 받는 거라고, 나는 아예 대상이 아니라고 했다.
스스로 그렇게 믿고 있었다.
사업을 정리하면서 신용이 많이 상했고, 그 뒤로 금융이라는 단어가 붙은 건 쳐다보지도 않았다.
은행 창구에 가는 것 자체가 싫었다.
그렇게 몇 해를 살다 보면 그게 사실인지 아닌지를 확인해볼 생각조차 안 하게 된다.
확인해서 안 된다는 소리를 듣는 게 무서워서, 아예 확인을 안 하는 거다.
지금 생각하면 그게 제일 어리석었다.
그 자리에서 손사래를 치고 나서 며칠 뒤에 그 얘기가 다시 떠올랐다.
떠올린 이유는 그 제도를 알고 싶어서가 아니었다.
내가 왜 그렇게 빠르게 아니라고 했는지가 신경에 걸렸기 때문이다.
생각해보니 나는 그 제도가 뭔지 들어보지도 않고 아니라고 한 거였다.
내용을 듣고 판단한 게 아니고 내 처지를 먼저 판단한 셈이었다.

■ 스스로 쳐놓은 울타리
사람이 한 번 크게 깨지면 그 자리에 울타리를 친다.
여기까지는 내 땅이고 저쪽은 내 땅이 아니라고 혼자 정해놓는 거다.
그 울타리가 처음에는 자기를 지켜주는 것처럼 느껴진다.
더 다치지 않으려고 쳐놓은 거니까.
그런데 몇 해가 지나면 그게 지켜주는 게 아니라 가둬놓는 거라는 걸 알게 된다.
나는 그 울타리 안에서 몇 해를 살았다.
돌아보면 그 울타리를 세운 건 어떤 기관도 아니고 어떤 규정도 아니었다.
내가 세운 거였다.
그리고 세운 사람이 나라서, 지울 수 있는 사람도 나밖에 없었다.
문제는 울타리 안에 있는 사람한테는 그게 세상의 크기로 보인다는 점이다.
밖에서 금을 그어주는 사람이 없으면 그게 울타리인 줄도 모른다.
그런데 그 울타리를 세운 게 꼭 나쁜 선택이었다고만은 생각하지 않는다.
한 번 크게 깨진 사람한테는 그게 그 시기를 넘기는 방법이었다.
문제는 넘긴 뒤에도 그걸 걷지 않았다는 데 있었다.
필요해서 쳤던 것을 필요가 끝난 뒤에도 그냥 두고 사는 일이 생각보다 많다.
■ 앱 하나 깔아보라던 말
그분은 내 말을 듣고도 물러서지 않으셨다.
요즘은 스마트폰에 앱 하나만 깔면 신용을 바로 조회할 수 있다고 하셨다.
시간이 꽤 지났으니 본인이 생각하는 것과 다를 수 있다고, 확인이나 한번 해보라고.
반신반의하면서 앱을 깔았다.
깔아놓고도 한참을 못 눌렀다.
숫자를 보고 나면 다시 한번 가라앉을 것 같아서였다.
그러다 밤에 혼자 앉아서 눌렀다.
화면 속 숫자를 한참 들여다봤다.
생각보다 신용이 많이 회복되어 있었다.
그동안 내가 뭘 특별히 한 게 없는데도 그랬다.
시간이 지나면서 저절로 올라간 것들이 있었고, 그 사이에 내가 갚아나간 것들도 있었다.
그 숫자가 대단히 좋았다는 얘기를 하려는 게 아니다.
중요한 건 내가 머릿속에 넣고 다니던 숫자와 화면에 뜬 숫자가 달랐다는 점이다.
나는 몇 해 전의 나를 아직 들고 다니고 있었던 거다.
그 사이에 시간이 흘렀는데 내 머릿속만 그 자리에 멈춰 있었다.
그날 밤 혼자 한참을 앉아 있었다.
억울한 것도 아니고 기쁜 것도 아닌 이상한 기분이었다.
몇 해 동안 나를 묶어놓고 있던 게 사실이 아니라 짐작이었다는 걸 확인 한 번으로 알게 된 게, 허탈했던 것 같다.
그러고 나니 그 전 몇 해가 다르게 보였다.
은행 창구를 피하고 금융이라는 말이 붙은 걸 쳐다보지 않던 그 몇 해 동안, 내 쪽에서는 아무 일도 안 일어난 게 아니었다.
갚을 건 갚으면서 살았고 시간은 흘렀다.
그 사이에 숫자는 조용히 올라가고 있었는데, 그걸 들여다볼 생각을 안 한 사람만 그대로였던 거다.

■ 전화 한 통
이튿날 떨리는 마음으로 담당 기관에 전화를 걸었다.
수화기를 들고도 한참 망설였다.
무슨 말부터 해야 하나, 안 된다고 하면 뭐라고 해야 하나.
그런데 막상 통화는 몇 분 만에 끝났다.
상황을 설명드리고 자격이 되는지 물었더니, 충분히 가능하다는 답이 돌아왔다.
전화를 끊고 한참 그대로 앉아 있었다.
닫혀 있다고만 생각했던 문이 스르륵 열리는 기분이었다.
정확히 말하면 문은 원래 열려 있었고, 내가 몇 해 동안 그 앞에 서보지도 않았던 거였다.
그게 더 허탈했다.
묻는 데 드는 시간은 오 분이었다.
그 오 분이 아까워서가 아니라 무서워서 몇 해를 돌아간 셈이었다.
그 뒤로 나는 뭐든 안 된다고 짐작되는 게 있으면 일단 물어보는 버릇이 생겼다.
물어보는 건 공짜고, 안 물어봐서 놓치는 건 값이 비싸다.
이 버릇 하나가 그 뒤로 나를 여러 번 살렸다.
안 될 것 같은 일도 일단 전화를 걸어보면 반은 된다고 하고, 안 된다고 해도 그 자리에서 다른 길을 알려주는 경우가 많았다.
담당자분들은 안 된다고 말하는 게 일이 아니라 되는 길을 찾아주는 게 일이라는 것도 그때 알았다.
내가 창구를 무서워했던 건 창구가 무서워서가 아니라 내 쪽이 겁먹고 있어서였다.
한 가지 더 알게 된 게 있다.
전화를 받으신 분은 내 사정을 모르는 사람이었다.
내가 몇 해 전에 뭘 했고 어떻게 넘어졌는지 그쪽에서는 알 이유가 없었다.
기준에 맞는지 아닌지만 보면 되는 자리였다.
그걸 모르고 있어서 내가 창피할 거라고 미리 정해놓고 있었던 거다.
부끄러움은 대개 상대가 주는 게 아니라 자기가 먼저 꺼내 든다.
■ 공무원을 만나러 간 날
가장 먼저 한 일은 담당 공무원을 만나러 간 것이었다.
전화로는 한계가 있으니 직접 가서 듣는 게 낫다고 생각했다.
서류 봉투 하나 들고 갔는데, 가서 보니 내가 준비해 간 건 거의 쓸모가 없었다.
그쪽에서 설명해주신 절차와 일정이 내가 생각한 것과 많이 달랐다.
순서가 있고 기한이 있고 조건이 있었다.
그걸 한 장에 받아 적었다.
이 교육을 몇 시간 들어야 하고, 그다음에 어떤 심사가 있고, 언제까지 뭘 내야 하고.
적어놓고 보니 길긴 한데 막막하지는 않았다.
막막한 건 모를 때고, 순서가 적히고 나면 그냥 하나씩 하면 되는 일이 된다.
그 자리에서 곧바로 필수 교육을 신청했다.
나오면서 그 종이를 몇 번이나 봤다.
글씨가 엉망이었는데도 그게 그렇게 든든했다.
그 뒤로 뭐가 복잡하면 일단 적는다.
적는 것만으로 반은 풀린다는 걸 그날 배웠다.
수첩을 들고 다니기 시작한 것도 그날부터였다.
그 자리에서 받아 적은 것 중에 제일 중요했던 건 순서가 아니라 기한이었다.
언제까지 뭘 안 내면 그해는 지나간다는 설명이 몇 번 나왔다.
현장 일은 하루 늦어도 다음 날 만회할 수 있지만, 기한이 적힌 서류는 하루가 지나면 그냥 끝이다.
그 말을 듣고 달력에 전부 옮겨 적었다.
그리고 그 달력을 조 대표님께 한 번 보여드렸다.
빠뜨린 게 두 개 있다고 하셨다.

■ 강의실에 앉아서
교육은 생각보다 길었다.
강의실에 앉아 이론을 배우는 과정이 먼저 있었다.
농업과 농촌에 관한 제도, 경영, 회계, 판로.
오랜만에 책상에 앉아 필기를 하려니 손이 어색했다.
글씨가 생각보다 빨리 안 써졌다.
옆자리에 앉은 분들도 사정이 비슷했다.
도시에서 내려온 사람, 부모님 농사를 물려받으려는 사람, 아직 뭘 할지 못 정한 사람.
쉬는 시간에 몇 마디씩 나누다 보면 서로 어디쯤 서 있는지가 보였다.
나는 그중에서 이미 사업자를 내고 물건을 팔고 있는 쪽이었다.
그게 유리한 자리인지는 그때 몰랐다.
수업 내용 중에 반쯤은 내가 이미 몸으로 해본 것들이었고, 반쯤은 전혀 모르는 것들이었다.
해본 쪽은 왜 그렇게 되는지를 알게 됐고, 모르는 쪽은 그런 게 있다는 걸 알게 됐다.
배운다는 게 그 두 가지를 같이 하는 일이라는 걸 그때 알았다.
회계 수업이 제일 낯설었다.
숫자를 보는 건 해봤지만 그걸 장부라는 형식으로 정리하는 건 안 해본 일이었다.
그때는 그 수업이 왜 필요한지 몰랐다.
몇 해 뒤에 법인을 만들고 기장이라는 걸 하게 되면서야 그 수업 생각이 났다.
배운 게 바로 쓰이는 경우는 드물고, 몇 해 뒤에 엉뚱한 자리에서 쓰이는 경우가 훨씬 많다.

■ 사흘 밤 나흘 낮
이론 교육이 끝나고 삼박 사일 일정으로 전국의 귀농 성공 사례 현장을 돌아보는 견학 프로그램에도 이름을 올렸다.
안 가도 되는 거였는데 신청했다.
남들이 어떻게 하고 있는지를 눈으로 보고 싶었다.
그 선택이 그 뒤 몇 해를 좌우했다.
버스를 타고 전국을 돌았다.
어떤 데는 작게 하고 있었고 어떤 데는 꽤 크게 벌여놓고 있었다.
자기 터전을 일궈낸 사람들의 현장을 직접 밟고 서니, 마음 밑바닥에서 묵직한 자신감 같은 것이 차오르는 게 느껴졌다.
공통점이 하나 있었다.
전부 처음에는 아무것도 없이 시작했다는 것.
빈 땅에 서 있던 사진을 보여주면서 여기가 저기가 됐다고 설명하시는데, 그 말이 그렇게 크게 들렸다.
저분들이 했으면 나도 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견학에서 제일 많이 들은 말은 돈 얘기가 아니었다.
어떻게 버텼느냐는 얘기였다.
처음 두세 해를 어떻게 넘겼는지, 그때 뭐가 제일 힘들었는지를 물어보면 다들 비슷하게 대답하셨다.
팔 데가 없어서 힘들었다고.
만드는 건 어떻게든 되는데 사줄 사람을 찾는 게 제일 오래 걸렸다는 거였다.
그 말을 여러 분한테 들으니 그게 한 사람 얘기가 아니라는 걸 알았다.
나는 그 부분이 이미 조금 깔려 있는 사람이었다.
로컬 매장에 들어가 있었고 온라인에서도 주문이 오고 있었다.
버스에서 돌아오는 길에 그 생각을 했다.
남들이 제일 오래 걸린다고 하는 걸 나는 조금 앞질러 가지고 있었던 거다.
그러면 그걸 써야 했다.
숙소에서 같은 방을 쓴 분들과 밤늦게까지 얘기했다.
각자 뭘 하려는지를 떠들다 보면 내 계획이 정리됐다.
말로 꺼내보지 않으면 자기 계획에 어디가 비었는지도 모른다.
사흘 동안 그걸 여러 번 확인했다.
견학에서 본 것 중에 제일 기억에 남는 건 규모가 큰 데가 아니었다.
어떤 분은 작업장이 우리 집 마루보다 조금 큰 정도였다.
그런데 그 안이 자리가 딱 잡혀 있었다.
어디에 뭐가 있고 어떤 순서로 손이 움직이는지가 보이는 공간이었다.
돌아와서 우리 작업장을 보니 그렇지 않았다.
물건이 들어오는 자리와 나가는 자리가 섞여 있었다.
그날 본 게 몇 해 뒤 공장을 지을 때까지 머릿속에 남아 있었다.

■ 명단에 이름이 오르다
교육을 다 이수하고 나니 심사가 있었다.
그동안 준비한 것들을 정리해서 내고, 계획을 설명하는 자리였다.
그 모든 과정의 길목마다 조 대표님이 함께 계셨다.
서류를 어떻게 쓰면 되는지, 뭘 먼저 준비해야 하는지, 심사에서 뭘 물을 것 같은지.
그분이 짚어주시면 나는 그걸 받아 적고 그대로 했다.
혼자 했으면 아마 교육 단계에서 지쳐서 접었을 거다.
서류 한 장 앞에서 사람이 얼마나 쉽게 포기하는지는 해본 사람만 안다.
심사를 통과해 최종 지원 대상자로 선정됐다는 연락을 받았다.
명단에 내 이름이 올라가 있었다.
그 명단을 몇 번이나 다시 봤다.
몇 해 전까지만 해도 나는 그런 명단에 이름이 올라갈 수 없는 사람이라고 믿고 있었다.
그 종이를 사진으로 찍어뒀다.
누구한테 보여줄 것도 아니었는데 그냥 남겨두고 싶었다.
내가 안 된다고 정해놓았던 걸 기관이 된다고 적어놓은 종이였다.
사람 하나가 자기에 대해 내린 판정이 얼마나 쉽게 틀릴 수 있는지를 그 종이가 보여주고 있었다.
그 통보를 받고 제일 먼저 조 대표님께 전화를 드렸다.
그분은 별로 놀라지 않으셨다.
될 거라고 알고 있었다는 식이었다.
나한테는 생전 처음 받는 소식이었는데 그쪽에서는 예정된 순서였던 거다.
아는 사람과 모르는 사람이 같은 소식을 받는 방식이 그렇게 다르다.
그날 저녁에 팔복이를 데리고 한참 걸었다.
더 자랑할 사람이 없어서 개한테 떠들었다.

■ 끝이 아니라 시작
그런데 거기서 끝이 아니었다.
지원 대상자가 되면 모든 게 다 해결되는 줄 알았는데 전혀 그렇지 않았다.
오히려 그때부터 진짜가 시작됐다.
무엇을 어디에 어떻게 짓겠다는 걸 구체적으로 만들어야 했고, 단계마다 확인받아야 할 것들이 줄줄이 있었다.
그 뒤로 정말 바빴다.
조용하게 살겠다는 맘으로 팔복이와 내려온 사람이, 도시에 있을 때보다 더 많은 사람을 만나고 다니게 됐다.
읍내로 시내로 기관으로 돌아다니는 날이 늘었다.
그 바쁨이 싫지 않았다는 건 사업자를 낼 때 적은 그대로다.
한 계단 한 계단 올라갈 때마다 그 옆에 그분이 계셨고, 그래서 넘어지지 않았다.
지금 돌아보면 그 모든 게 앱 하나 깔아보라는 말 한마디에서 시작됐다.
제도를 몰랐던 게 문제가 아니었다.
제도는 어차피 공개돼 있고 찾아보면 나온다.
문제는 나한테 해당된다는 생각을 아예 못 했던 쪽이었다.
그걸 깨주는 건 정보가 아니라 사람이었다.
그래서 요즘은 나도 누가 자기는 안 된다고 하면 일단 알아보라고 말한다.
내가 들었던 말을 돌려주는 셈이다.
그리고 하나 더 있다.
그때 내가 한 일 중에 제일 값이 나간 건 교육을 다 들은 것도, 서류를 낸 것도 아니었다.
안 된다고 정해놓은 걸 한 번 확인해본 거였다.
확인하는 데 든 건 앱 하나와 전화 한 통이었다.
그 두 가지로 몇 해가 풀렸다.
세상에 그만한 품으로 그만한 걸 되돌려주는 일이 흔하지 않다.
"하늘이 무너져도 솟아날 구멍이 있다"
옛사람들은 아무리 막막한 처지라도 반드시 빠져나갈 길이 하나는 남아 있다는 뜻으로 이 말을 썼다.
흉년이 들어 곳간이 비고 빚에 몰려 더는 방법이 없어 보이는 집에도, 손을 놓지 않고 이리저리 알아보는 사람에게는 어디선가 길이 하나 트이더라는 것이다.
다만 그 구멍은 주저앉아 하늘만 올려다보는 사람 머리 위로 저절로 뚫리지 않았다.
벽을 손으로 더듬어본 사람, 문이란 문은 다 두드려본 사람 쪽에서 먼저 열렸다.
그래서 이 말은 체념을 달래는 말이 아니라 끝까지 알아보라는 말로 전해져 왔다.
— 한국 속담.
막혔다고 느껴질 때조차 실제로 다 막혀 있는 경우는 드물다는 뜻이다.
대개는 막힌 게 아니라 아직 확인해보지 않은 것이고, 확인하지 않은 채로 안 될 거라고 정해버리는 쪽이 사람을 더 오래 묶어둔다.
그러니 될지 안 될지를 혼자 판단하지 말고 물어볼 수 있는 데에 먼저 물어보는 게 순서다.
나도 몇 해를 그렇게 묶여 있다가, 앱 하나 눌러보고서야 그게 짐작이었다는 걸 알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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