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옮겨온 글 ▣
예전 블로그에 써두었던 글을 옮겨 왔다. 문장은 그때 그대로 두고, 읽기 편하게 조금만 매만졌다.
가을 들판은 사람 마음을 이상하게 만든다.
벼가 누렇게 되고 하늘이 높아지면 한 해가 다 간 것 같은데, 실제로는 그때부터 할 일이 몰린다.
거두는 일이 심는 일보다 바쁘다는 걸 농사 몇 해 짓고 알았다.
그런데도 그 무렵이면 마음이 들뜬다.
들뜬다기보다 조급해진다.
한 해가 또 지나가는데 나는 어디쯤 왔나 하는 생각이 든다.
도시에서는 연말에 그런 생각을 했고, 여기서는 가을에 한다.

■ 자격이 쌓이는 걸 봤다
법인을 세우고 한 해쯤 지난 무렵이었다.
숨이 조금 돌아왔다.
공장이 있고 인증이 있고 법인이 있었다.
물건은 로컬 매장과 온라인으로 나가고 있었고 거래처도 전보다 늘었다.
그런데 그 자리에서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편해지지가 않았다.
하나 갖추면 다음 게 보이는 일이 몇 번 반복되고 나니, 이게 끝이 아니라는 걸 알게 된 거였다.
공장을 지을 때는 공장만 있으면 될 줄 알았다.
인증을 받을 때는 인증만 받으면 될 줄 알았다.
법인을 만들 때도 그랬다.
그런데 그 세 개를 다 갖춰놓고 보니, 그게 바닥이고 그 위에 또 층이 있었다.
그 층이 뭔지는 몰랐다.
다만 지금 내가 아는 것만으로는 거기까지 못 간다는 건 알았다.
그 느낌이 처음은 아니었다.
장아찌를 담가 팔던 해에도 비슷한 걸 느꼈다.
그때는 손으로 만들어 팔 수 있는 양에 한계가 있다는 걸 알았고, 그래서 공장 얘기가 나왔다.
공장이 서니 위생 기준이 걸렸고, 그래서 인증 얘기가 나왔다.
인증을 받으니 거래처 형태가 걸렸고, 그래서 법인 얘기가 나왔다.
그 순서가 전부 그런 식이었다.
걸리는 데가 생기면 거기를 뚫었다.
그런데 그때는 걸리는 자리가 분명하지 않았다.
무엇이 막혀 있는지도 모르면서 막혀 있는 느낌만 있었다.
그게 제일 답답한 종류의 막힘이다.
어디가 막혔는지 알면 거기를 뚫으면 되는데, 모르면 손을 쓸 데가 없다.
그래서 그걸 알아내는 것부터 해야 했다.

■ 모르는 게 보이기 시작했다
그 무렵에 자주 겪은 일이 있다.
사람을 만나면 내가 모르는 말이 나왔다.
유통 쪽 사람과 앉아 있으면 마진이니 수수료니 하는 얘기가 나왔다.
가공 쪽 사람과 앉아 있으면 설비 얘기, 수율 얘기가 나왔다.
듣고 있으면 대충 알아먹는데 정확히는 몰랐다.
모르는 걸 모른다고 말하는 게 어려운 자리도 있었다.
거래처 앞에서 모른다고 하기가 쉽지 않았다.
그래서 돌아와서 찾아봤다.
찾아보면 나오는 것도 있고 안 나오는 것도 있었다.
안 나오는 쪽이 더 많았다.
책에 없는 걸 사람들은 어디서 배웠을까 싶었다.
어깨 너머로 배운 거였다.
나는 어깨 너머로 볼 자리가 없었다.
혼자 시작했고 혼자 하고 있었으니까.
그게 제일 답답한 부분이었다.
그 무렵에 한 번은 거래처 사장님과 저녁을 먹었다.
그분이 자기 공장에 새로 들인 기계 얘기를 하셨다.
얼마나 들었고 몇 달 만에 본전이 빠지는지를 숫자로 말씀하셨다.
나는 그 숫자를 어떻게 뽑는지를 몰랐다.
그래서 고개만 끄덕이고 있었다.
집에 돌아오는 차 안에서 그게 계속 걸렸다.
고개를 끄덕인 게 창피한 게 아니었다.
그 자리에서 물어볼 만한 질문조차 떠올리지 못한 게 걸렸다.
모르면 묻기로 한 사람인데, 무엇을 물어야 할지를 모르니 묻지도 못한 거다.
그런 자리가 몇 번 반복되고 나니까 결론이 하나로 모였다.
배워야 했다.

■ 그릇 얘기
그때 머릿속에 떠오른 말이 그릇이었다.
내 그릇이 이 정도구나 하는 생각이 자꾸 들었다.
여기까지는 담았는데 더 담으려면 그릇이 커져야 했다.
그릇이라는 말이 좀 막연한데, 구체적으로는 두 가지였다.
아는 것과 아는 사람.
그 두 개가 다 모자랐다.
아는 건 혼자 찾아서 조금씩 늘릴 수 있었다.
아는 사람은 혼자서는 안 되는 거였다.
그래서 어디 가서 배워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됐다.
배우겠다는 게 거창한 뜻이 아니었다.
같은 일 하는 사람들이 모여 있는 자리에 가 앉아 있고 싶었다.
거기 앉아 있으면 어깨 너머로 보이는 게 있을 것 같았다.
나이 사십 중반에 학교 얘기를 꺼내는 게 민망하기도 했다.
그런데 그 민망함은 며칠 지나면 사라지는 종류의 것이었다.
안 배운 답답함은 몇 해가 지나도 안 사라졌다.
어느 쪽이 더 오래 남는지 계산하면 답이 나왔다.
집에서도 그 얘기를 했다.
학교에 좀 다녀야겠다고.
무슨 학교냐고 묻는데 설명하기가 어려웠다.
농업인 교육이라고 했더니, 그러면 다녀오라고 했다.
반대할 줄 알았는데 아니었다.
그 대신 한 가지를 물었다.
그러면 그 시간에 하던 일은 누가 하느냐고.
그게 제일 현실적인 질문이었다.
대답을 못 했다.
그 질문의 답을 찾는 게 결국 그 한 해의 숙제였다.
그래서 과정을 고를 때 날짜부터 봤다.
주 며칠이고 몇 시간인지, 어느 요일인지.
요일이 중요했다.
출고가 몰리는 요일을 비우면 그 해 장사가 흔들린다.
그걸 계산해보고 나서 넣을 데를 정했다.

■ 경북농민사관학교
그래서 알아보다가 알게 된 데가 경북농민사관학교였다.
이름이 꽤 거창하다.
처음 그 이름을 들었을 때는 군대 같은 데인가 싶었다.
알아보니 경상북도에서 2007년에 세운 교육기관이었다.
도내 농업인을 전문적으로 교육하려고 만든 것이었다.
교육을 도가 직접 하는 게 아니라 대학에 위탁하는 방식이었다.
경북대학교, 경북전문를 포함해 20여 개 대학에서 과정을 맡고 있었다.
과정도 여러 가지였다.
작목별로 나뉜 것도 있고, 가공이나 유통처럼 분야별로 나뉜 것도 있었다.
2024년까지 누적 수료생이 2만 6천 명을 넘겼다고 한다.
그 숫자를 나중에 알고 놀랐다.
경북 안에서만 그만큼이면, 내 주변에도 수료한 분들이 있었을 거라는 얘기다.
그런데 나는 그 전까지 그런 데가 있는 줄도 몰랐다.
또 몰라서 못 쓰고 있었던 거였다.
그 패턴이 몇 번째인지 세기도 어렵다.
귀농 지원도 그랬고 인증 제도도 그랬다.
있는데 모르는 것.
시골에서 사업하는 사람에게 제일 큰 손해가 그거다.
그리고 이런 것들은 광고를 하지 않는다.
공고문을 올려두고 신청받는 식이다.
찾아보는 사람에게만 보이게 되어 있다.
그러니 결국 찾아보는 습관이 자산이었다.
그 습관을 만들어준 게 조 대표님이었다.
처음 몇 번은 그분이 알려주셨고, 그다음부터는 내가 찾아봤다.
알려주는 사람이 평생 옆에 있을 수는 없으니, 찾는 법을 배워야 했다.
그 무렵에는 어지간한 공고문은 내가 먼저 보고 여쭤봤다.
그런데 찾아보는 것만으로는 반쪽이었다.
읽어도 내 얘기인지 아닌지가 헷갈리는 게 많았다.
조건이 애매하게 적힌 것도 있고, 읽는 사람 사정에 따라 달라지는 것도 있었다.
그럴 때는 전화를 걸었다.
담당자분께 내 사정을 말씀드리고 되는지 물어봤다.
안 된다는 답을 들은 적도 많다.
그래도 물어서 안 된다는 걸 아는 게, 모르고 지나가는 것보다 나았다.
물어보는 데 드는 건 전화 한 통이었다.
■ 자격을 먼저 봤다
그 무렵에는 뭘 알아보든 자격부터 먼저 봤다.
몇 번 겪고 생긴 버릇이었다.
좋아 보이는 걸 발견하면 들뜨기 전에 조건을 읽는다.
조건이 안 맞으면 아무리 좋아도 내 얘기가 아니다.
들뜬 다음에 조건을 읽으면 실망이 두 배가 된다.
농민사관학교의 조건은 두 가지였다.
경작지가 경상북도 안에 있는 농어업인이어야 했다.
그리고 농업경영체등록확인서가 있어야 했다.
읽고 나서 조금 웃었다.
둘 다 이미 되어 있었다.
문경에서 농사짓고 있었으니 첫 번째는 자동이었다.
농업경영체는 귀농하고 얼마 안 돼서 등록해뒀다.
그때는 왜 하는지도 잘 모르고 했다.
하라고 해서 했다.
그게 몇 해 뒤에 입학 조건이 되어 돌아왔다.
그 종이를 어디에 뒀는지 한참 찾았다.
서류를 넣어두는 상자가 있었는데 거기 있었다.
꺼내서 보니 등록한 날짜가 꽤 오래전이었다.
그 종이가 몇 해 동안 상자 안에서 아무 일도 안 하고 있었던 거다.
그런데 그날 하루 일을 했다.
서류는 그런 식으로 일한다.
쓸 날이 오기 전까지는 아무것도 아니고, 쓸 날이 오면 그게 전부가 된다.
그래서 서류는 버리면 안 된다는 걸 그때 또 배웠다.
그 뒤로 서류 상자를 두 개로 나눴다.
지금 쓰는 것과 언제 쓸지 모르는 것.
언제 쓸지 모르는 쪽이 훨씬 두꺼웠다.
그런데 몇 해 지나고 보니 그 두꺼운 쪽에서 꺼내 쓴 게 더 많았다.
■ 미리 해둔 것이 돌아온다
그 자리에서 생각한 게 있다.
내가 지나온 걸 되짚어보면, 미리 해둔 게 뒤에서 값을 한 경우가 꽤 많았다.
농업경영체 등록이 그랬다.
해썹도 그랬다.
의무가 아닌데 받았고, 그게 거래처 문을 열었다.
법인도 그랬다.
그때 당장 필요해서 한 게 아닌데 몇 달 뒤에 거래처가 달라졌다.
그러니까 당장 쓸 데가 안 보이는 것을 해두는 게 결국 남는 장사였다.
문제는 그걸 할 때는 쓸 데가 안 보인다는 거다.
그래서 안 하게 된다.
나도 혼자였으면 안 했을 것이다.
누가 옆에서 해두라고 했으니까 한 거였다.
그 차이가 몇 해 뒤에 벌어진다.
지금도 누가 물으면 그 얘기를 한다.
지금 안 쓸 것 같은 것도 자격이면 받아두시라고.
받아두는 데 드는 건 며칠이고, 없어서 못 가는 데는 몇 해다.
그리고 자격이라는 건 서로 물려 있었다.
농업경영체가 있어야 농민사관학교에 가고, 농민사관학교를 수료해야 또 그다음 칸이 열렸다.
하나가 비어 있으면 그 뒤가 다 막힌다.
사슬처럼 되어 있는 걸 그 무렵에 눈으로 봤다.
그걸 알고 나니 자격 하나를 받는 게 그 자체로 끝나는 일이 아니게 됐다.
다음 칸을 여는 열쇠를 하나 받는 거였다.
그러니 자격을 받을 때는 그 자격이 무엇을 열어주는지 같이 알아두는 게 좋았다.
그걸 알면 순서를 짤 수 있다.
먼저 받아야 할 것과 나중에 받아도 되는 것이 갈린다.
나는 그 순서를 혼자 짜지 못했다.
짜주는 사람이 있었으니 그 몇 해를 헛돌지 않았다.

■ 식품학과를 골랐다
과정은 식품 쪽으로 정했다.
내가 하는 일이 산야초를 가공해서 만드는 거였으니, 식품 공부가 제일 가깝다고 봤다.
영주에 있는 경북전문대에서 맡은 과정이었다.
문경에서 영주까지 거리가 가깝지는 않았다.
그 거리가 처음부터 걸렸다.
생산 일정이 있는데 주 몇 번을 비워야 하는 거였다.
그래도 하기로 했다.
거리 때문에 안 하면, 거리 때문에 평생 못 하는 것들이 생긴다.
시골에서 뭘 배우려면 거리는 늘 붙어 있는 조건이다.
그걸 이유로 삼기 시작하면 아무것도 못 한다.
원서를 쓰면서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학교에 원서를 내본 게 언제였나 싶었다.
그 종이를 쓰는 데 오래 걸렸다.
왜 배우려고 하느냐는 칸이 있었는데, 거기서 한참 멈췄다.
쓰려면 쓸 말이 많은데, 종이에 적으려니 다 거창하게 들렸다.
결국 간단하게 적었다.
지금 하고 있는 걸 제대로 하고 싶다고.
그리고 한 줄 더 적었다.
배운 걸로 뭘 하겠다는 얘기였다.
그 칸을 적으면서 처음으로 내가 몇 해 뒤에 무엇을 하고 있을지를 그려봤다.
그 전까지는 다음 달까지만 생각하고 살았다.
그날 처음으로 몇 해 뒤를 적었다.
적어보니 꽤 구체적이었다.
원재료부터 내가 키워서, 가공해서, 내 이름으로 팔고 있는 그림이었다.
그 그림이 그 뒤 몇 해 동안 나를 끌고 갔다.
적어둔 그림이 있는 사람과 없는 사람은 다르게 움직인다.
원서를 넣고 나서 며칠은 괜히 기다렸다.
붙을지 안 붙을지를 몰랐으니까.
떨어지면 민망하겠다는 생각도 했다.
그 나이에 떨어지면 말도 못 꺼낼 것 같았다.
그런데 그 걱정도 며칠 지나니 가라앉았다.
떨어지면 이듬해에 또 넣으면 되는 거였다.
한 번에 되는 일만 하려고 하면 할 수 있는 게 몇 개 안 남는다.
그 며칠 동안 한 일이 하나 있다.
식품 쪽 책을 몇 권 사다 놓고 들춰봤다.
가면 무슨 말이 나올지 모르니 미리 좀 봐두자는 생각이었다.
읽어보니 반은 모르는 말이었다.
그래도 모르는 말이 어떤 모양인지는 눈에 익었다.
그 정도만 해둬도 강의실에서 덜 멍하다는 걸 나중에 알았다.

■ 나이를 세지 않기로 했다
원서를 넣고 나서 괜히 신경 쓰인 게 하나 있었다.
나이였다.
사십 중반에 뭘 배우러 간다는 게 남들 눈에 어떻게 보일까 싶었다.
젊은 사람들 사이에 섞여 앉아 있으면 어색하지 않을까.
그 생각을 며칠 했다.
그러다 그만뒀다.
생각해보면 나는 몇 해 전에 아무것도 모르고 시골에 내려온 사람이었다.
그때도 남들 눈이 어떨까를 꽤 걱정했다.
서울에서 사업하다 망해서 내려온 사람으로 보일까 봐.
그런데 실제로 와보니 아무도 그런 데 관심이 없었다.
각자 자기 일 하느라 바빴다.
남들이 나를 어떻게 볼지 걱정하는 시간이 제일 아깝다는 걸 그때 배웠다.
그걸 또 하려고 하고 있었던 거다.
그래서 나이는 세지 않기로 했다.
배울 데가 있으면 가고, 모르면 묻고, 늦었다는 생각은 안 하기로.
늦었다는 계산은 결국 안 하겠다는 말을 좋게 포장한 것이었다.
■ 그릇을 키운다는 건
돌아보면 그 결정이 그 몇 해의 방향을 또 한 번 틀었다.
그 전까지 내가 갖춘 건 전부 서류였다.
공장 허가, 인증서, 등기부.
그런데 그때 하려던 건 서류가 아니었다.
내 머리에 집어넣는 거였고, 사람을 만나는 거였다.
서류는 돈과 시간으로 되는데 그건 그렇게 안 된다.
직접 앉아 있어야 되는 거였다.
그릇을 키운다는 게 결국 자리에 가서 앉아 있는 일이라는 걸 그때 알았다.
읽어서 되는 게 아니었다.
가서 앉아 있으면 저절로 들어오는 게 있었다.
그게 뭔지는 가보고 알았다.
그러고 보면 그때 내가 한 건 공부를 하겠다는 결정이 아니었다.
한 해 치 시간을 떼어서 쓰겠다는 결정이었다.
돈보다 시간이 아까운 사람에게 그건 쉬운 결정이 아니다.
생산을 비워야 하고, 배달을 미뤄야 하고, 주문을 조절해야 했다.
그 셈을 다 해보고도 하기로 한 이유는 하나였다.
그렇게 안 하면 몇 해 뒤에도 같은 자리에 있을 것 같았다.
같은 자리에 있는 게 제일 무서웠다.
그래서 그 결정에 이름을 붙이면 공부가 아니라 투자였다.
돈을 넣는 투자가 아니라 시간을 넣는 투자였다.
시간을 넣는 투자는 결과가 늦게 나온다.
한 해를 통째로 넣고 그 해에는 아무 일도 안 일어난다.
몇 해 지나서 전혀 다른 자리에서 값을 한다.
그걸 못 기다리는 사람은 시간을 못 넣는다.
나는 그걸 기다릴 수 있게 된 사람이었다.
공장 지을 때 한 해를 기다려봤고, 인증 받을 때 또 몇 달을 기다려봤으니까.
기다리는 것도 몇 번 해보면 늘어난다.
"活到老 學到老"
(활도로 학도로)
중국에서 오래 쓰이는 말이다.
글자 그대로 옮기면, 늙을 때까지 살면 늙을 때까지 배운다는 뜻이다.
배움에 끝나는 나이를 정해두지 않은 사람들의 말투다.
들에서 일하던 노인이 새 농기구가 들어오면 그 쓰는 법을 아들에게 묻고, 글을 모르던 사람이 환갑이 넘어 글자를 익히는 일이 드물지 않았다.
그런 모습을 두고 사람들이 이 말을 했다.
그래서 이 말에는 격려보다 당연함의 어조가 있다.
살아 있는 동안은 배우는 게 사람의 일이라는 것이다.
— 중국 속담.
배움에는 마치는 나이가 없다는 뜻이다.
늦었다는 계산은 대개 하지 않겠다는 마음을 점잖게 적어둔 것에 가깝다.
사십 중반에 학교 원서를 쓰면서 민망했던 며칠이 있었지만, 안 배워서 답답했던 몇 해보다는 훨씬 짧았다.
그릇을 키우고 싶다면 결국 어딘가에 가서 앉아 있는 수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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